도시의 모습이 정치와 깊은 관계가 있다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세계사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도시는 정치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조선왕조가 한양(서울)으로 천도한 것부터가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이 느리지만 조금씩 복구되고 있던 시기에 4.19, 5.16 등 엄청난 정치적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잇따랐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는 5.16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에 5.16 주역이었던 김종필씨는 미국 정부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여러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주한미군과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위락시설을 갖춘 대규모 호텔 건설’이다. 위락시설을 만들면 주로 일본으로 휴가가는 주한미군이 서울에서 휴가를 보내며 돈을 쓰게 하는 동시에 군사정권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이에 따라 1961년 하반기 대규모 호텔을 조성할 곳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한강변 별장터가 선정됐다. 부지 면적은 19만1천여평. 李대통령은 가끔 이곳에 들러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울창한 아차산을 등진 이곳은 한강의 흐름과 넓은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었다.

새 호텔에는 ‘워커힐(Walker Hill)’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주한미군과 유엔군의 휴가 장병을 유치하기 위해 짓는 호텔인 만큼 한국전쟁 중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호텔과 함께 들어설 빌라의 이름도 더글러스(맥아더).머슈즈(리지웨이) 등 미군이나 유엔군 장군의 이름을 붙였다.

비밀리에 추진되던 워커힐 건립 계획은 62년 봄 일본의 주간지들이 앞다퉈 “한국의 군사정권이 미군 장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여자와 도박판 위주의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알려졌다.

미국의 AP.뉴스위크 등도 62년 10월 “이 시설은 매춘굴.카지노.미인 호스티스 등을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미국 부인단체가 유엔군 사령부와 한국 정부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워커힐의 주설계는 김수근씨가 맡았다.

그는 서울대 공대 재학 중 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뒤 도쿄(東京)예술대 건축과, 도쿄대 건축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워커힐 설계에는 김수근 외에 김희춘·나상진·엄덕문·이희태·강명구 등 여러 명의 건축가가 참여했다.

63년 4월 워커힐이 문을 열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러자 서울시장들은 워커힐 가는 길을 정비하고 도로변에 건설공사를 벌였다. 이는 朴대통령에게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한양대 앞 성동교는 64년부터 2년간 확장공사를 벌였다. 또 뚝섬지구의 토지구획 정리사업이 시작되고, 성동교에서 워커힐에 이르는 광나루길은 폭 10m에 불과했으나 66년에 30m로 넓어졌다.

결국 워커힐은 당초 건립 목적인 많은 미군 장병 유치에는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했지만, 서울 동부지역 개발에는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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