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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과 베트남' <5>… 미국이 개입하게 된 배경제2부 제2차 베트남전쟁
  • 최용호 소장
  • 승인 2013.06.1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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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국제정세는 미국 중심의 자유세계(Free World)와 소련 중심의 공산진영(Communist Bloc)이 대립하는 양극(兩極)체제가 만들어 졌다. 그리고 동유럽과 독일 등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소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냉전(Cold War)체제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소련은 1948년 6월 베를린을 봉쇄함으로써 영향력을 과시했고, 1949년 8월 29일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에 대항하는 양극체제를 보다 확고하게 구축했다. 냉전체제가 더욱 격화되면서 중국대륙이 공산화됐다. 그 와중에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대결로 간주됐던 베트남 사태 역시 동서 이념대결 양상으로 성격이 바뀌게 됐다.

▲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 정책

제2차 세계대전이 계속되고 있던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 중국 총통이 만나 전후처리 방안을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루스벨트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3국(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의 전후처리에 대해 프랑스의 복귀를 반대했다. 그는 “전후 인도차이나 3국은 한국 등과 함께 신탁통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장제스의 뜻을 물었다.

장제스는 “중국은 인도차이나 사태에 개입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신탁통치 안에 대해서는 당신과 같은 생각이다.”라고 화답했다. 그러나 처칠의 생각은 달랐다. “인도차이나를 프랑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신탁통치가 실시될 경우 홍콩 등 자신들의 식민지에 까지 그 여파가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이로회담에 이어 열린 테헤란회담에서 스탈린에게 인도차이나 3국과 한국의 신탁통치안을 제기해 그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1945년 4월 루스벨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미국의 인도차이나 정책은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은 자유우방의 협력을 강조했으며, 아시아 식민지국가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복귀를 적극 저지할 의사가 없었다. 그때부터 확고했던 루스벨트의 인도차이나 정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쯤 자유프랑스 운동을 장악한 드골이 트루먼에게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트루먼은 윈난(雲南)에 있는 미 제14공군에게 “프랑스군을 지원해 주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베트남 사태에 개입하게 된 첫 번째 계기였다.

   
▲ 카이로회담과 3국 정상. 왼쪽으로부터 장제스 중국 총통,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 프랑스의 베트남 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원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자, 포츠담의 합의에 따라 베트남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중국군과 영국군이 베트남에 진주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중국 및 영국과 협상을 통해 그들과 교대한 후 베트남을 다시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고려해 그들의 베트남 지배를 적극 저지하지 않았다.

그 후 미·소의 대립으로 시작된 냉전체제와 함께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화되자,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우려는 더욱 심화됐다. 그 와중에 1950년 1월 18일 마오쩌둥(毛澤東) 정부가 호찌민 정부를 승인했다. 이어서 같은 달 30일 소련이 중국에 선수를 빼앗겼다는 듯이 호찌민 정부를 승인하면서 경쟁적으로 호찌민 정부에 대한 원조를 시작했다.

그동안 프랑스의 식민정책에 반대 입장을 취했지만, 어쩔 수 없이 프랑스에 끌려가고 있던 미국도 프랑스 편들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1950년 2월 7일 호찌민 정부를 공산정부로 규정하고, 프랑스 괴뢰정부로 간주했던 바오다이의 베트남 정부를 승인했다. 이어서 프랑스에 대한 원조제공도 발표했다.

그 결과 제1차 베트남전쟁은 프랑스 식민주의와 베트남 민족주의가 대결하는 국지적인 분쟁으로부터 자유진영이 지원하는 프랑스와 공산진영이 지원하는 호찌민 세력의 대결, 즉 범세계적인 이념분쟁으로 그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그때부터 미국은 공산주의 팽창의 도미노(domino) 현상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6월 25일 유엔이 승인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이 김일성의 침략을 받았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의 전쟁은 단순한 내전(內戰)이 아니었다. 동남아시아 사태와 연결시켜 볼 때, 공산주의 팽창의 마수(魔手)가 그 화살을 한반도로 바꾼 것이었다.

미국은 다급해졌다. 따라서 미국은 6·25전쟁에 즉각 참전하는 한편, 호찌민군과 전투중인 프랑스군에게 군사원조를 제공하면서,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도록 역할을 분담했다. 그때부터 프랑스는 미국을 대리해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 프랑스의 베트남 철수와 미국의 정책

3년을 끌어오던 한반도의 전쟁은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1953년 7월 27일 정전(停戰)협정을 체결함으로써 겨우 봉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호찌민 세력과 대결하고 있던 프랑스는 미국의 적극적인 원조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프랑스를 돕기 위한 미국의 원조는 6·25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급격히 증가되기 시작해 1954년까지 총 36억 달러에 달했다. 그 결과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지출한 전쟁비용의 60%를 미국이 부담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그해 7월 20일, 제네바에서 베트남 평화협정에 서명하면서 베트남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프랑스가 떠난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해야 할 책임을 미국이 떠안을 수 밖에 없었다.

 

   
 

최용호 사단법인 전쟁과평화연구소장(국제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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