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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과 베트남' <7>… 베트남 평화협상제2부 제2차 베트남전쟁
  • 최용호 소장
  • 승인 2013.06.1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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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미국의 환상은 1968년 1월 NLF와 북베트남군의 뗏(Tet)공세를 계기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뗏공세 이후 NLF와 북베트남은 인적자원과 보급능력 고갈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미국 국민의 생각은 달랐다. 전쟁의 실상이 TV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면서 베트남전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베트남전쟁의 의미와 성격에 의문을 제기하는 미국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반전(反戰)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기필코 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존슨 정부의 의지도 국민의 거센 저항을 극복할 수 없었다. 강경론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눈앞에 다가온 승리를 내부 분란으로 놓치게 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 ‘뗏공세'와 미국의 평화협상 제의

뗏공세 이후 자국(自國)의 반전여론에 직면한 존슨 정부는 1968년 3월 31일 성명을 통해 북폭을 중지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상을 제안했다. 또한 소련과 영국에게도 협상의 성사를 위해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같은 존슨의 선언으로 미국은 베트남에서 군사적 승리를 포기하고, 북베트남과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이 북베트남에게 협상을 구걸한 셈이다.

미국의 평화협상 제안에 대해 하노이 정부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노이 측은 존슨의 협상제안 3일 후 “미국의 제안을 수락한다.”고 발표했다. 그 결과 미국과 북베트남의 평화협상을 위한 예비회담이 1968년 5월 10일 파리에서 열렸으며, 13일에는 제1차 본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협상은 진척되지 못했다. 미국은 북폭 중지를 조건으로 북베트남의 양보를 요구했고, 북베트남은 폭격의 완전한 중지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상전투는 더욱 가열되기만 했다.

   
▲ 평화협정 발효 당시 지배지역. NLF와 북베트남군은 산악지역을, 남베트남군은 도시와 평야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정책

1968년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닉슨(Richard M. Nixon)의 베트남정책은 미군이 패배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미군을 서서히 철수시키고, 그 공백을 사이공 정부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닉슨은 1969년 6월 8일 태평양의 미드웨이(Midway)섬에서 남베트남의 티에우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8월말까지 미군 2만5천여 명을 철수 시키고, 연말까지 더욱 많은 병력을 감축할 것임을 밝혔다.

미국의 정책이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로부터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으로 선회했음을 선언한 것이다. 또한 닉슨은 그해 7월 25일 괌(Guam)에서 “앞으로 미국은 국지전 개입을 제한할 것이며, 자국(自國)의 방위는 자국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의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했다.

그 같은 닉슨의 정책에 따라 1968년 말 54만8천여 명이던 베트남의 미군은 1972년말까지 2만9천여 명으로 대폭 감소되었다. 그 대신 1967년 말 기준, 63만여 명이었던 남베트남군은 1970년도부터 100만 명을 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적인 숫자일 뿐이었다. 규모와 장비면에서 남베트남군은 어느 선진국 군대에 못지않았지만, 훈련이 부족했으며, “내 나라를 내 힘으로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 북베트남의 최종공세와 평화협정 체결

1968년 5월에 시작된 파리 평화협상은 진척이 없었다. 그러나 반전여론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던 미국은 마냥 시간을 끌 수 없었다. 1969년 1월 25일부터는 “NLF를 평화협상 당사자로 포함시키자”는 북베트남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이공 정부를 포함하는 4자회담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회담은 제자리였다.

지지부진한 회담을 타개하기 위해 1969년 8월부터 닉슨의 안보담당 보좌관인 키신저(Henry A. Kissinger)와 하노이 정부의 정치국원 레둑토(Le Duc Tho)가 비밀회담을 계속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이 너무 달라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의 주장은 현 상황을 기초로 대안(代案)을 강구하는 것이었지만, 하노이 정부는 남베트남에서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불법단체로 간주했던 티에우 정부의 해체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양측의 견해 차이가 좁혀지지 않자, 하노이 정부는 또 다시 무력에 의한 해결을 시도 했다. 북베트남은 1972년 3월 12개 사단을 투입해 ‘춘계공세’를 감행했다. 닉슨은 곧 북폭으로 맞서며, 성역으로 간주하고 있던 하노이 폭격까지 감행했다.

닉슨이 하노이 폭격을 승인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긴장완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1972년 2월 닉슨이 베이징을 공식방문하고, 이어서 5월에는 소련을 공식 방문했다. 그 같은 닉슨의 폭넓은 정상외교 활동으로 미국은 하노이측을 보다 강하게 압박할 수 있었다.

미국의 의지와 세계정세 변화를 실감한 하노이 지도자들은 “무엇보다도 미군의 철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1972년 7월 파리 평화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10월 8일 하노이 대표는 평화협정 발효 시점을 기준으로 NLF의 지배지역을 인정한다는 조건 하에 ‘티에우 정부의 존속’을 최초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10월 21일에는 협상초안이 거의 완성되었다.

그러나 티에우가 완강히 저항했다. 닉슨은 그를 달래기 위해 다량의 최신무기를 제공하면서 휴전 후 재건을 위한 상당량의 원조를 약속했다. 이번에는 하노이가 티에우 정부에 대한 미국의 무기제공을 트집 잡아 11월에 재개된 협상은 12월에 결렬되고 말았다.

닉슨은 또 다시 하노이와 하이퐁 지역에 대규모 폭격을 단행해 하노이 대표를 회담장으로 불러냈다. 1973년 1월 8일부터 협상초안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한편 닉슨은 대통령 특사를 사이공에 보내 티에우를 설득했다. 티에우 역시 거의 모든 것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입장에서 더 이상 미국의 요구를 거절 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키신저와 레둑토는 1973년 1월 23일 평화협정에 가조인했다. 1월 27일에는 유엔 사무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1월 28일 오전8시(베트남 시간)부터 발효됐다.

평화협정이 발효됨에 따라 미국의 개입으로 10년 가까이 계속된 제2차 베트남전쟁은 막을 내리게 됐다. 파병된 미군과 한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평화협정 발효 후 60일 이내에 철수를 완료한다.”는 조항에 따라 1973년 3월 26일까지 철수했다.

그때부터 남베트남은 자신의 나라를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만 했다. 파리 평화협정이 남베트남의 평화를 보장해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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