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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과 베트남' <8>… 남베트남 패망제2부 제2차 베트남전쟁
  • 최용호 소장
  • 승인 2013.06.1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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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내부분열로 막강전투력 쓸모없이 자멸

1973년 1월 28일 ‘베트남평화협정’이 발효되고, 미군 등 연합국 군대가 철수함에 따라 남베트남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나라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외세 척결을 외쳐오던 대부분의 남베트남 국민들은 모든 외국군이 철수했음에도 북베트남과 NLF의 도발에 대해 방관적 자세로 일관했다.

당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 및 NLF와 비교해 월등히 우세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 1월 북베트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이에 맞선 남베트남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그해 4월 30일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허수아비와 같았던 NLF 정권은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이 주도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the Socialist Republic Vietnam)’에 흡수되고 말았다.

◇ 불안한 평화협정 체제

베트남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협정의 이행 여부를 감독하기 위해 캐나다, 헝가리, 인도네시아, 폴란드 정부 대표로 구성된 국제 감시위원단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조약 위반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조약 당사자들의 전쟁종결 의지였지만, 파리 평화협정은 당사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국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었다.

결과적으로 파리 평화협정은 전쟁을 문서 상으로 종결시켰을 뿐이며, 실제로는 미군 철수를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남베트남 국민도 평화가 올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며, 실제로 전투는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보다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1954년 제네바 협정 체결이후 20년 가까운 기간동안 남베트남의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다. 또한 1965년 이후부터는 대규모의 미군과 외국군이 파병됨에 따라 그들의 소비에 의존한 바 컸다. 그러나 외국군대가 철수하자, 시장은 위축되었고 서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 사회불안을 가중시켰다.
경제를 지탱하던 달러의 유입이 줄어들면서 한때 부유함을 맛보았던 국민의 불평은 높아만 갔다. 또한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함께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소총과 무전기 등 미국이 지원해 준 최신 군사장비가 베트콩의 주장비로 사용되고 있었다.

평화협정 체결 후 지속적인 원조를 약속했던 미국의 지원도 급감했다. 1973년 11월 미국 의회는 미군의 해외파병에 관한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미군의 재개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1974년 8월 닉슨이 ‘워터게이트(Water Gate)사건’으로 물러나자, 티에우는 가장 중요한 후견인을 잃었다.

평화협정이 체결될 당시 남·북의 군사력은 외형상으로 비슷했다. 그러나 당시 남베트남에는 미군이 철수하면서 넘겨준 최신장비와 함께 110만 명의 병력, 세계 4위를 자랑하는 공군력 등 막강한 전력을 보유했다. 따라서 낡은 재래식 장비와 빈약한 보급체계를 가진 북베트남과 NLF의 전력은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반면 전투의지와 필승의 신념 등 정신력을 고려한다면 결코 우세할 수 없었다.

   
▲ 사이공 중심가 남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하는 북베트남군 전차. 전차에 게양된 깃발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깃발이다.

◇ 제3차 베트남전쟁(해방전쟁)

1974년 10월 북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총공세를 결의하고, 이어서 시험적으로 12월 13일 사이공 북쪽 135㎞ 지점의 푸옥롱(Phuoc Long)성(省)을 점령했다. 하노이측은 이를 계기로 “미국은 더 이상 자신들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자신감을 확인한 북베트남군은 3월 10일 3개사단을 동원해 전략적 요충지인 부온마투옷(Buon Ma Thuot)을 기습적으로 점령했다. 부온마투옷이 점령되면서 제1, 2군단이 각각 철수를 시작하자, 군인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가재도구를 챙기기에 급급했고, 민간인들이 가세하면서 철수대열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 곳곳에서 베트콩들의 기습이 가해지자, 남베트남군은 스스로 붕괴되고 말았다.

결국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한 채 남베트남 2개 군단이 붕괴되고 말았으며, 대부분의 장비를 유기한 채 극소수의 병력만이 해상으로 철수했다.

◇ 남베트남의 패망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수립

북베트남이 총공세로 전환한 후 단 한 차례의 공세로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던 남베트남군 2개 군단이 무너졌다. 오히려 하노이 지도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하노이 정부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전략을 바꾸어 5월 중순에 시작되는 우기(雨期)이전에 사이공을 함락시키기로 결정했다.

4월 2일부터 사이공을 향해 남진하기 시작한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이 버리고 간 차량과 민간인 버스 및 트럭, 승용차 등 가용한 모든 차량을 동원했고, 부족한 운전병은 포로 중에서 충당했다. 수 만대의 차량이 남쪽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자, 사이공은 대혼란에 빠졌다. 미군 비행기는 사이공 정부의 주요 관리들과 가족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티에우는 4월 21일 대통령직을 부통령에게 인계하고 사임했다. 그러나 부통령 또한 사임하자 4월 28일 온건파인 즈엉반민(Duong Van Minh) 장군이 대통령직을 인수했다.

한편 4월 26일 북베트남군 17개 사단이 사이공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선에서 철수해 온 남베트남군 7개 사단도 최후의 투혼을 발휘해 4월 28일까지 방어선을 지탱했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중과부적이었다. 참모총장 등 고위관리들은 미 대사관으로 달아나 헬기를 이용해 탈출했다. 마지막으로 4월 30일 07:53에 대사관에 남아있던 미군 해병대가 헬기를 이용해 철수함으로써 모든 미국인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미군의 철수를 확인한 북베트남군은 날이 밝으면서 T-34 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재개했다. 최후까지 협상을 시도하던 민 대통령은 4월 30일 10:20 라디오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降伏)을 발표했다.

사이공 정부의 항복과 관계없이 북베트남군 전차 1대가 11:30경 대통령궁의 정문을 부수고 진입했다. 그들은 경비병을 무장 해제시키고, 12:45경 남베트남 국기를 끌어내린 후 임시혁명정부의 깃발을 올렸다. 이로써 1955년 10월 26일 지엠에 의해 건국된 ‘베트남공화국(the Republic of Vietnam)’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전쟁의 대가는 엄청났다. 인명피해만 해도 사이공 정부군 11만 명이 전사하고, 49만9천명이 부상당했으며, 민간인도 41만5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노이 정부는 1975년 정부군과 베트콩을 포함해 110만여 명이 사망하고, 60만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무력에 의해 남베트남을 점령한 북베트남은 국가 통합에 착수했다. 그리고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이 주도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the Socialist Republic Vietnam)’에 흡수 통합했다. 그 결과 베트남은 명실공히 통일된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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