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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과 베트남' <10>… 제1차 파병제3부 한국군 참전 및 철군
  • 최용호 소장
  • 승인 2013.06.2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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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9월 의료진-태권도교관 첫 140명 첫 승선

1964년 3월 17일 존슨 정부는 베트남 사태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이어서 미국은 “베트남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보다 많은 우방국을 끌어들여 국제사회의 참여와 지지를 얻어낸다.”는 ‘More Flags’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1964년 5월 9일 한국 등 25개 우방국에게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미국 정부가 한국에 보낸 서한에는 ‘1개 이동외과병원’을 파병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건군 이후 최초의 해외파병을 위한 한국 정부의 조치가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 제1이동외과병원 창설식. 건군 이래 최초의 해외파병부대 창설이었다.(1964년 7월 14일)

◇ 건군 이후 최초의 해외파병을 위한 절차

존슨 미 대통령으로부터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접수한 박정희 대통령은 김성은 국방부장관에게 미국의 요청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존슨의 서한을 접수하기 전부터 파병을 기정사실화하고, 파병의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해두고 있었다. 따라서 존슨의 서한은 이를 공식화해 명분을 쌓는 것에 불과 했다.

한편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 정부가 요청한 ‘1개 야전병원’의 파병은 인도적 차원의 파병으로 ‘전투병력 파병’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해외파병에 관한 경험이 전혀 없었으며, 베트남의 작전 실태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의료지원단 파병은 매우 귀중한 기회였다.

한국군 파병에 대한 당시 정부의 입장은 “공산침략을 받고 있는 남베트남 사태는 한국의 안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국가안전보장의 측면과, “6·25전쟁시 도와준 자유우방에 보답한다.”는 국제적 신의의 차원이었다. 따라서 국민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었다.

그 같은 분위기에 따라 국방부는 파병을 위한 조치를 구체화해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과 10명으로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등 14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어서 국방부는 1964년 6월 10일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병하겠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7월 9일에는 김종오 합참의장이 주한 미군사령관 하워즈(Hemilton H. Howze) 대장을 방문해 구체적인 파병절차를 협의했다.

또한 정부는 1964년 7월 15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한국군 파병을 요청하는 서한(書翰)을 접수한데 이어 7월 31일에는 ‘파병동의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한 결과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 사이공 인근 붕따우서 첫 활동

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하기 위한 정부의 조치에 따라 부대편성과 훈련을 마친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은 1964년 9월 11일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항했다. 그리고 10여 일 간의 항해 끝에 9월 22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Saigon)에 도착했다. 다음날 사이공에서 한국군 최초의 파병을 환영하는 행사에 참가한 후 9월 25일에는 남베트남 육군 정양병원이 위치한 붕따우(Vung Tau)에 도착했다. 이어서 9월 28일 시무식을 갖고 주월 한국군으로서 첫 업무를 시작했다.

한편 태권도교관단은 9월 23일 사이공에서 환영행사에 참가한 후 이동외과병원과 분리되었으며, 남베트남 육군보병학교와 육군사관학교 및 해군사관학교에 각각 3명씩 배치되어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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