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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과 베트남' <11>… 제2차 파병(건설지원단)제3부 한국군 참전 및 철군
  • 최용호 소장
  • 승인 2013.06.2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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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킹만사건 계기 비전투 ‘비둘기부대’ 2000명 추가


한국에서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 파병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1964년 8월 ‘동낀(Tong Kin)만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정부가 “1964년 8월 2일과 4일 통킹만 공해상에 정박 중인 미 해군함정을 북베트남 어뢰정이 공격했다.”라고 발표한 것이다.

그때의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선전포고를 발표하지 않았으나 북베트남을 공식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8월 5일 항공모함을 급파해 북베트남 내의 유류 저장소를 집중 폭격했다.

이어서 8월 7일 미 의회가 ‘통킹만 결의안’을 가결해 베트남에서 전쟁수행에 관한 전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함으로써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 건설지원단이 건설한 사이공(현 호찌민시) 외곽의 환상도로 준공식 모습. 지금도 호찌민 시의 중요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 건설지원단 파병요청 및 파병절차

베트남전쟁이 확대되자, 미국은 전쟁의 명분을 확대하기 위해 보다 많은 자유우방의 지원이 필요했다. 아울러 후방지역에서 전쟁복구 사업을 지원하고 있던 남베트남군까지 전선에 투입됨으로써 후방지원 병력의 추가지원이 필요했다.

그때쯤인 1964년 12월 18일 브라운(Winthrop G. Brown) 주한 미 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고 남베트남에서 후방지원을 담당할 비전투부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존슨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박대통령은 김성은 국방부장관을 불러 “이미 예상했던 일인 만큼 신속히 부대를 편성해 파월 준비를 갖추고, 국회의 동의를 구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내부 검토를 마친 국방부는 1964년 12월 22일 김종오 합참의장을 주한 미군사령관 하워즈 대장에게 보내 구체적인 파병안을 협의했다. 그때 미국측에서 요청한 병력은 공병 1개대대와 수송 및 정비요원 등1,000여 명 규모의 병력이었다.

그러나 한국측 입장에서 볼 때 건설지원 활동이 야전에서 이루어지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체경계 요원이 필수적이었으며, 파병규모를 보다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자체 경계를 위한 보병 1개 대대를 추가하고, 준장급의 ‘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편성해 2,000명 규모로 확대된 파병안을 마련한 후 주한 미군사령관과 합의했다.

이어서 국방부는 1965년 1월 2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한국군 2차 파병을 요청하는 서한을 접수하고,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상정해 동의를 받았다.

◇ 비둘기부대 창설 1965년3월 파병

국회에서 건설지원단 파병안이 가결됨에 따라 국방부는 부대편성을 서둘렀다. 이에 따라 1월 29일 강원도 현리에 위치한 제6사단사령부에서 ‘한국군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뜻의 ‘비둘기부대’로 명명했다.

예하부대로 육군 제127공병대대를 기간으로 자체방어를 위한 경비대대, 수송자동차중대, 해병 공병중대, 해군 수송분대(LST) 등으로 편성됐다. 또한 앞서 파병된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을 통합지휘 하도록 했다.

파병준비를 마친 비둘기부대는 3월 10일 인천항에서 미 해군 수송함 T-AP호에 탑승해 미 제7함대 소속 함정과 함재기의 호위를 받으며 출항한 후 3월 16일 사이공에 도착했다. 사이공에서 한·미·베트남 정부 요인과 주민들의 환영 속에 상륙한 비둘기부대는 시가행진을 마친 후, 사이공 동북쪽 22㎞ 지점의 지안(Di An)으로 이동해 주둔하면서, 사이공 외곽도로 건설과 각종 건설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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