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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과 베트남' <12>… 제3차 파병(전투부대)제3부 한국군 참전 및 철군
  • 최용호 소장
  • 승인 2013.06.2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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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각서 합의 청룡-맹호부대 추가, 주월사령부 창설

1964년 8월 ‘통킹만사건’ 이후 미국의 지상군 파병은 예상되어 있었다. 단지 그 시기가 문제일 뿐이었다. 대통령 선거 등의 정치일정에 따라 지상군 파병을 늦추고 있던 미국은 1965년 3월 8일 해병 2개 대대를 첫 번째 지상군 전투부대로 다낭(Da Nang)에 상륙시켰다.

이어서 미 합참은 1965년 3월 20일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보다 적극적인 작전을 위해 미군 2개 사단과 한국군 1개 사단의 파병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공식적으로 건의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을 위한 제안과 토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 전투부대 파병요청 및 파병절차

한국군의 제2차 파병이 있었던 1965년이 되면서 베트남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미국의 강력한 북폭에도 불구하고, ‘호찌민루트’를 이용한 북베트남 정규군의 남파가 계속됨에 따라 남베트남의 곳곳에서 지상전투가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쯤인 3월 11일 김현철 주미 대사는 볼(George W. Ball) 미 국무부차관과 면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추가적인 병력을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을 방문했던 이동원 외무부장관도 “한국은 미국을 돕는 것을 만족하게 여길 것이며, 필요하다면, 더 큰 부대를 지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이동원 장관은 브라운 주한 미 대사와 협상을 통해 “① 파병 병력의 상한선은 5만 명 이내로 한다. ② 한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한다. ③ 북한의 침공 시 미국이 즉각 출병할 수 있도록 한·미 방위조약을 개정한다. ④ 파병에 소요되는 경비를 미국이 부담한다. ⑤ 남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市場) 진출을 보장한다.” 등의 파병조건을 제시했다.

그 같은 한국 정부의 요구사항은 1965년 5월 17일부터 18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부분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65년 6월 14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전투병력 파병을 요청하는 공한을 접수한데 이어 8월 13일에는 국회의 의결을 거쳐 1개 사단규모의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 주월 한국군사령부 마크(좌), 수도사단(맹호부대) 마크(중), 제2해병여단(청룡부대) 마크(우)

◇ 주월 한국군사령부 창설과 파병

국회에서 ‘파병동의안’이 심의되고 있는 동안 국방부는 파병부대 선정에 착수했다. 앞서 두 차례에 걸친 파병 경험이 있었지만, 전투부대 파병은 비전투부대 파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안이었다. 따라서 국방부는 합참에 ‘파병기획단’을 설치해 보다 신중한 검토를 거듭했다. 그 결과 육군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을 파병부대로 선정했다.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은 재창설과 같은 수준으로 개편하고,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로 명명한 후 파병을 위한 교육훈련을 서둘렀다. 또한 국방부는 1965년 9월 25일부로 파병부대를 통합 지휘할 ‘주월 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수도사단장 채명신 소장을 사령관(겸임)으로 임명함으로써 한국군 최초의 통합군사령부가 탄생했다.

이어서 10월 9일 청룡부대가 남베트남 중부의 깜란(Cam Ranh)에 상륙하고, 그 뒤를 이어 수도사단이 11월 1일까지 뀌년(Quy Nhon)에 상륙했다. 또한 주월 한국군사령부가 10월 20일 사이공에 개소됨으로써 파병된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본격적인 작전활동을 수행하게 되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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