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한국군 참전 및 철군

주한미군 문제와 연계, 두 단계 나눠 배-비행편 철수

북베트남군과 NLF의 뗏(Tet)공세 이후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여론이 급격히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이 교체됐다. 민주당의 존슨이 지원한 험프리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된 공화당의 닉슨(Richard M. Nixon)이 1969년 1월 20일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따라서 미국의 베트남 정책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닉슨의 베트남정책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서서히 철수하고, 그 공백을 남베트남군으로 메우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닉슨은 ‘베트남에서 단계적 철군’을 발표하고, 동년 7월부터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으며, 한국을 제외한 나머지 참전국들도 미군과 보조를 맞추어 주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 주한 미군의 계속 주둔과 주월 한국군

베트남에 파병했던 연합군의 철수가 시작되자, 한국에서도 국회를 중심으로 한국군 철수문제가 제기 되었다. 그러나 1970년 11월 미국을 방문했던 최규하 외무부 장관은 “현시점에서 한국군은 철수를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발표하는 등 한국 정부는 1970년 12월 초까지 철군문제를 표면에 내놓지 않고 있었다.

당시 정부가 한국군의 철수를 서두르지 않았던 것은 주한 미군 철수 문제와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한국군 파병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주한 미군의 현상유지’를 반복해 확인했으며, “주한 미군을 철수시킬 경우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조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있는 동안은 주한 미군 철수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미국은 1970년 7월, 주한 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철수를 일방적으로 결정해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 박대통령은 여러 경로를 통해 주한 미군의 철수 저지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당시 호놀룰루 정상회담에 참가하고 있던 박대통령은 주월 한국군 철수문제를 제기하면서 주한 미군 철수 저지를 위한 위협수단으로 활용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한국과 협의 없이 주한 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약속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 수원비행장으로 귀국한 주월 한국군의 모습

◇ 주월 한국군의 제1단계 철수

주한 미군 1개 사단의 철수에 따라 정부도 더 이상 주월 한국군의 철수를 미룰 명분이 없었다. 박대통령은 1971년 1월 11일, 연두(年頭)기자회견을 통해 베트남전쟁을 언급하면서 “월남군의 전투력이 빠른 속도로 강화되어 ‘월남전쟁의 월남화(越南化)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주월 한국군의 단계적 감축을 검토하고 있다. 그 시기는 월남 정부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충분히 협의한 후 결정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철군문제를 공식화했다.

이어서 정부는 미국 및 남베트남 정부와 협의를 거쳐 1971년 11월 6일 한국군 제1단계 철수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주월 한국군사령부는 제1단계 철수부대로 제2해병여단과 해군수송전대 및 지원부대 일부병력 등 1만 명을 7개 제대로 편성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일부터 1972년 4월 13일까지 해상으로 철수시켰다.

◇ 주월 한국군 제2단계 철수

주월 한국군의 제2단계 철수 역시 제1단계 철군과 함께 검토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2단계 철군에 대해서는 한·미·남베트남 정부의 입장에 차이가 있었다. 당시 정부는 “1972년 말까지 나머지 한국군을 모두 철수시키겠다.”는 방침을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에 통보했다. 그러나 미군은 철수시기를 1972년 말 이후로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남베트남 정부는 1973년 말까지 계속 주둔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따라 정부는 “주월 한국군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1972년 말까지 잔류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 결과 1972년 말을 기준으로 할 때 남베트남에 파병한 연합군 중 가장 많은 병력으로 남베트남을 지원하고 있었다.

한편 1972년 9월이 되면서 베트남 평화협상이 빠른 속도로 진척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평화협정 발효 후 60일 이내에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평화협정의 규정에 따라 항공기를 이용해 주월 한국군을 신속히 철수시키는 ‘개선문계획’을 수립했다.

이어서 1973년 1월 23일 베트남 평화협정이 조인되고, 28일 오전 8시부로 발효됨에 따라 남베트남에 파병된 외국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한국군은 1973년 1월 30일 선발대 125명이 항공기를 이용해 철수했고, 11개 제대로 편성된 본대는 2월 3l일부터 3월 13일까지 역시 항공기를 이용해 귀국했다. 그리고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복귀함으로써 8년 6개월 동안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었던 한국군의 철수가 완료됐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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