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포화속에 사라진호국영령들

故 조정남·이학현 상병

고(故) 조정남 상병은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적장을 안고 자결한 논개(論介)와 비교될만한 영웅이다. 제2해병여단 제11중대가 짜빈동 중대기지를 공격한 1개 연대규모의 북베트남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제3소대 제1분대 소총수였던 조정남 일병과 같이 해병대의 용맹을 과시한 장병의 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 짜빈동 기지 피습

▲ 조정남 일병의 생전모습

당시 적은 사전 치밀한 정찰과 준비를 거쳐 압도적인 병력으로 11중대 기지를 쓸어버리려 했다. 1개 연대규모의 적 앞에 놓여진 1개 중대의 기지는 그야말로 커다란 파도 앞에 놓여진 조그만 섬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정남 일병과 같은 해병 용사들의 활약으로 조그만 섬이 모래성이 아닌 단단한 바위섬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짜빈동 기지에 대한 적의 공격은 1967년 2월 14일 23시 20분쯤 시작됐다. 조정남 일병이 배치된 제3소대 정면의 외곽철조망에 적이 파괴통을 폭파시키면서 시작된 것이다.

아군의 즉각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적은 숲 속으로 도주했다. 적이 도주한 후 중대원 모두가 긴장된 밤을 보내고 있던 새벽 4시 10분쯤 또 다시 제3소대 정면에 적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소대는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그들을 최대한 가까이 접근 시킨 후 조명탄을 쏘면서 기습사격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피아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적의 기세는 맹렬했다. 소대의 용전이 계속됐지만 2개 대대규모의 적 병력이 집중된 소대 방어선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새벽4시40경이었다.

그때부터 기지 내부로 진입한 적과 해병용사의 육박전이 시작되었다.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으로 진격해온 그들은 해병용사의 용맹스러운 백병전에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따이한 라이 라이(한국군 이리와! 이리와!)”라고 외치며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넘으면서 전진을 계속했다. 중대의 기지는 피아간의 좌충우돌로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원들은 용전분투하며 적을 닥치는 대로 사살했다. 조명탄의 불빛 아래 수많은 적의 시체가 교통호 안팎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소대장 이수현 소위는 현 위치에서 지휘가 곤란해지자 일단 예비진지로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제1분대는 모두가 자신의 진지를 고수했다. 그 와중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용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 논개(論介)와 비교될 조정남 일병의 활약과 전사

그 때 조정남 일병은 착검된 소총으로 밀려드는 적과 육박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의 총검에 넘어진 적이 몇 명이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적들은 그를 향해 무더기로 달려들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오로지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적개심뿐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적이 던진 수류탄이 조정남 일병의 바로 옆에서 폭발했다. 그는 전신에 파편상을 입고 말았다.

온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조정남 일병은 그대로 주저 않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일어서 착검된 소총을 들고 달려드는 적을 찔렀다. 그러나 출혈이 계속되면서 전신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실감했다. 그때 3명의 적이 교통호를 따라 접근해 오자 그 자리에서 수류탄을 터트려 적과 함께 폭사했다. 자신의 소총도 수류탄 폭발과 함께 파괴되어 적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1개 중대가 1개 연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전투현장에는 조정남 일병과 같은 많은 해병용사들의 투혼이 빛났다. 그들의 투혼은 승리의 견인차가 되었다. 해병용사의 투혼으로 진지를 돌파한 적들을 모두 사살한 것은 아침7시20경이었다. 상황이 반전되자 기지 외곽에서 저항하던 1개 중대 규모의 적들도 전의를 상실한 듯 부상자를 부축해 기지 북서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여단에서는 그들을 향해 집중적인 화력을 퍼 부었다.

한·미·베트남 등 3개 국가의 언론은 조정남 일병과 같은 해병여단 장병의 영웅적인 투혼을 대서특필하며 찬사를 보냈다. 정부는 조정남 일병의 용맹과 투지를 높이 평가해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그를 호국인물로 선정해 추모하고 있다.

◇ 이학현 일병의 육박전과 장렬한 전사

▲ 이학현 일병의 생전 모습

제2해병여단 제11중대의 짜빈동 전투에서 ‘논개(論介)정신’을 발휘한 또 한사람의 영웅으로 고 이학현 상병을 빼어놓을 수 없다. 그는 고 조정남 일병과 같이 적의 주공이 지향됐던 제3소대 제1분대 소총수로 기지 북서쪽을 담당해 싸웠다.

적의 2차 공격이 시작됐던 1967년 2월 15일 새벽4시10분경,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한 적은 제11중대 기지를 물셀 틈 없이 포위한 후 공격을 시작했다. 중대도 여단의 지원화력과 함께 치열한 사격을 계속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적이 발사한 포탄이 여기저기에서 터지며 파편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적의 선봉부대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함성과 함께 돌격을 계속해 제3소대 정면의 외곽방어선을 돌파했다. 그들이 공격을 시작한지 불과 30분 후인 4시40경이었다.

제3소대 진지를 돌파한 적은 수류탄과 AK소총을 기관총처럼 발사하면서 물밀 듯이 기지 내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곳곳에서 육박전이 벌어지면서 기관총사수 김남섭 상병이 전사했다. 김상병의 뒤를 이어 이해수 일병이 다시 기관총을 잡았다.

다음 순간 이일병도 적의 사격에 쓰러지자 오준태 일병이 그를 대신했다. 그리고 오일병 마저 전사하자 송용섭 일병이 뒤를 이어 분전했으나 송일병 역시 적탄에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신음하면서도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총열을 뽑아 숲 속으로 던진 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는 실로 처절하고도 장렬한 광경이 되풀이해 연출되었다.

그때 이학현 일병은 사격과 총검으로 밀려오는 적의 정면을 막아서며 분전하고 있었다. 날아온 적탄이 그의 어깨를 관통했으나 그는 밀려오는 적에게 사격을 계속하며 수류탄을 던져 오물장에 빠진 적을 폭사시켰다. 급히 교통호로 돌아온 이학현 일병은 분대장 배장춘 하사 쪽으로 수명의 적병이 접근하자 수류탄으로 그들을 처치해 분대장을 위기에서 구했다. 그 순간 적이 발사한 탄환이 그의 오른쪽 발목을 꿰뚫고 말았다.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설 수 없게 된 그는 M1 소총에 크립을 장전해 옆에서 싸우고 있던 도성룡 일병에게 넘겨줬다. 그때 5명의 적이 교통호를 따라 그에게 달려왔다.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마지막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들고 우르르 몰려오는 적병들을 와락 끌어안으며 그들과 함께 폭사하고 말았다.

그처럼 이학현 일병은 뜨거운 전우애로 부대와 동료를 위기에서 구했으며 위기의 순간을 승리로 바꾸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정부는 이학현 일병의 용맹과 감투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그를 호국인물로 선정해 추모하고 있다.

▲ 베트남군 묘지. 당시 짜빈동 기지를 공격하다가 전사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매장한 묘지가 짜빈동 기지 인근에 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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