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포화속에 사라진 호국영령들

살신성인의 귀감

고 이상득 하사는 고 강재구, 이인호 소령의 얼을 이어 받은 살신성인의 영웅이다. 그는 제9사단 제28연대 제11중대 제3소대 제2분대 부분대장으로 1966년 9월, 사단과 함께 베트남에 파병되어 뚜이호아 지역에 배치되었다. 당시 뚜이호아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으로 베트남 3대 곡창 중 하나였으며 베트콩의 활동이 왕성한 곳이었다.

◇ 두 전투부대 작전지역 연결 대규모작전

제9사단이 파병된 후 어느 정도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게 되자 주월 한국군사령부는 각각 분리되어있던 수도사단과 제9사단의 작전지역을 연결시키기 위한 야심찬 계획에 착수했다. 한국의 설화 “견우와 직녀가 만나게 된다.”는 의미의 '오작교작전'이 그것이다. 뀌년에 배치된 수도사단이 남쪽을 향해 공격하고 깜란-냐짱-뚜이호아에 배치된 제9사단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 두 개 사단의 작전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역사적인 작전이었다.

작전 시작 첫날인 1967년 3월 8일, 제11중대에 부여된 임무는 다랑강 남쪽 ‘락미마을’을 수색해 베트콩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중대는 마을에 도착한 즉시 주민들을 강변에 대피시킨 후 마을을 포위하고 가옥 하나하나를 수색해 나갔다. 마을 내부에는 곳곳에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어 중대원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 동굴수색중 굴러온 수류탄 덮치고 동료들 구해

▲ 이상득 병장의 생전모습

그때 이상득 병장의 제3소대 제2분대는 나무숲에 둘러싸인 독립가옥을 수색하던 중 가옥의 지하에 설치된 동굴을 발견했다. 분대장 이양규 하사의 지휘로 이상득 병장을 포함한 4명이 주저함 없이 동굴에 진입해 수색을 시작했다. 컴컴한 동굴 내부는 음침하기가 그지없었으며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내부의 온기와 냄새 등으로 판단할 때 베트콩이 은신하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긴장한 수색조가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나가고 있을 때 갑자기 ‘툭’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득 병장이 맨 앞에 나가고 있을 때였다. 이병장은 직감적으로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인 것으로 판단했지만 좁은 동굴 내부에서 피하거나 되돌아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수류탄이다”라고 소리침과 동시에 자신의 몸을 날려 검은 물체를 덮쳤다. 뒤이어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그의 몸은 산산이 부셔졌으며 장렬히 전사했다.

이상득 병장의 뒤를 따르던 분대장 이양규 하사와 오정식 상병, 최성일랑 일병 등 3명은 이상득 병장이 수류탄을 덮치는 순간 집중사격을 퍼부어 동굴에 은거하고 있던 베트콩을 사살한 후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동굴 내부는 메케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만 진동할 뿐 적막하기만 했다. 그들 모두도 수류탄 파편에 의해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흘러내리는 선혈은 군복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상득 병장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고 이상득 하사의 모교인 포항 동해초등학교에 그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상득 병장의 희생정신은 1965년 10월, 베트남 파월준비 훈련 중 부하가 떨어뜨린 수류탄을 덮쳐 중대를 구한 고 강재구 소령의 얼과 1966년 8월, 해풍작전 시 동굴 수색작전 중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을 덮쳐 대원들을 구한 고 이인호 소령의 얼을 이어 받은 것이다. 한국군의 희생정신과 용맹을 만방에 과시한 것이었다.

정부는 이상득 병장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해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전쟁기념관은 고 이상득 하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를 호국인물로 선정해 추모하고 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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