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포화속에 사라진 호국영령들

'닌호아 작전'의 영웅

1967년 11월 6일, 주월 한국군 백마부대의 닌호아2호 작전 시 송서규 중령의 전사는 대대장이 최전방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사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는 제9사단 제29연대 제2대대장으로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 부임해 온 후임 대대장과 합동근무 중이었다. 따라서 그는 전투현장에 직접 나서기 보다는 후임대대장으로 하여금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 후 소극적으로 작전에 임할 수도 있었다.

◇ 임기만료 앞두고 후임대대장과 합동작전

▲ 송서규 중령의 생전 모습

닌호아1호 작전은 그해 10월 24일, 2개 대대 규모의 베트콩이 제9사단사령부 남쪽 2㎞ 지역에 위치한 닌호아 시가지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산악 정글은 베트콩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국군이 장악하고 있던 시가지에 2개 대대를 투입한 그들의 작전은 대담한 도발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4월 18일, 수도사단(맹호부대)과 제9사단(백마부대)의 작전지역을 연결하는 오작교작전을 완수하고 뒤이어 홍길동작전으로 평정지역을 적극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지역의 베트콩은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건재를 알릴 수 있는 획기적인 행동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막강한 화력을 가진 한국군과 정면대결을 불사하며 과감하게 닌호아 시가지를 점령한 배경이었다. 반면 제9사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베트콩의 주력을 찾아 산악 정글에 들어갈 필요 없이 스스로 평야지대로 나온 적을 포위해 섬멸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한 셈이었다.

사단은 즉각 제29연대 제2대대와 제3대대를 투입해 닌호아1호 작전을 전개했다. 문제는 적이 인구가 밀집된 지역을 점령하고 있어 아군이 포격을 가할 경우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그들의 심리전에 말려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한 채명신 주월사령관은 “포병 등의 지원화력 없이 적을 격멸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로 인해 대대자체의 화력만으로 공격을 시작한 제29연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적 주력을 격멸하는데 실패했다.

◇ 포위망 압축중 적의 집중사격받고 전사

아군의 약점을 간파한 베트콩은 11월 6일 새벽, 또 다시 1개 대대 규모로 닌호아를 점령했다. 제29연대는 이번에도 제2-3대대를 투입해 그들을 포위하는 닌호아2호 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임기 만료를 앞둔 제2대대장 송서규 중령은 후임 대대장과 함께 출동했다.

송서규 중령은 닌호아1호 작전의 교훈을 기초로 제한된 포병화력을 사용하기로 했으며, 4개 중대로 베트콩을 포위한 후 그 중 제5중대와 6중대를 기동시켜 적을 압축섬멸하기로 했다. 그러나 적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완강히 저항했다. 그로인해 많은 아군 피해가 발생하면서 작전은 진척되지 않았다.

▲ 육군보병학교에 건립된 고(故) 송서규 대령 동상

공중에서 헬기로 작전을 지휘하던 송중령은 작전이 지연될 경우 닌호아1호 작전과 같이 적의 주력이 야음을 이용해 도주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포위망 압축이 가장 느린 제6중대 지역에 착륙한 송중령은 자신이 직접 중대를 지휘하면서 작전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송중령은 화기소대를 동쪽으로 우회시킨 후 전 중대가 일제히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지쳐있던 장병들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작전은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많았다. 17시가 되면서 상황이 급박해지자 송중령은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때 부상당한 제3소대장이 전사하자, 송중령은 제3소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병사들과 함께 50여m를 전진했다. 이어서 유탄발사기를 들고 사격을 계속하면서 진격하던 송중령은 30m 전방 농가에서 날아온 적의 집중사격에 가슴을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 작전의 교훈

송서규 중령이 전사한 후 제29연대는 다음날까지 작전을 계속해 베트콩 14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군도 전사 38명, 부상 51명의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닌호아2호 작전은 막대한 아군 피해에도 불구하고 적의 주력을 격멸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송서규 중령의 지휘에 대해서도 엇갈린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부하가 쓰러져가는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최전선에 나선 지휘관의 살신성인 정신만큼은 높이 평가돼야 할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정부는 송서규 중령에게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을 추서했으며, 전쟁기념관은 그를 호국인물로 선정해 추모하고 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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