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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한국과 베트남'<23>… 16일간 혈전 '638 안케전투'의 영웅 故 임동춘 대위4부-포화속에 사라진 호국영령들
  • 최용호 소장
  • 승인 2013.07.2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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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정규군 대공세 펼쳐

   
▲ 임동춘 중위의 생전 모습

안케전투는 수도사단(맹호부대) 기갑연대가 1972년 4월 11일~26일까지 안케고개(deo An Khe) 및 638고지 일대에서 치른 전투다. 그해 3월 증강된 연대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안케고개 일대에 은밀히 침투했다. 이어 적은 1번 도로를 차단한 후 638고지 하단의 제1중대 기지를 습격했다.

수도사단은 기갑연대뿐만 아니라 사단의 가용병력을 총동원해 격렬한 공세를 감행했다. ‘안케고개’는 베트남 중부 뀌년에서 서쪽 내륙으로 연결되는 19번 도로의 요충지였다. 당시 19번 도로는 내륙에 위치한 남베트남 제2군단의 주보급로였기 때문에 필히 확보해야 할 생명 줄과도 같은 도로였기 때문이다. 당시 임동춘 중위는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2중대 제1소대장이었다.

베트남에서 1972년을 전후한 시기는 미국이 평화협상에 매달리면서 주력을 대부분 철수시킨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사기가 높아진 반면 연합군의 활동은 위축되어 있을 때였다. 양측이 평화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골몰해오던 시기를 이용해 베트콩과 북베트남은 춘계대공세를 감행했다. 1972년 3월 말이었다.

   
▲ 안케고개 일대의 지형. 당시 수도사단 기갑연대는 소도산에 제1중대(-2), 지리산기지와 백두산기지에 각각 1개 소대씩을 배치하고 있었다.

◇ 철수 앞두고 경계소홀한 틈에 북베트남군이 기습

그때 북베트남 제3사단 예하의 제12연대가 안케고개 남쪽의 638고지를 점령했다. 고지 정상부에 강력한 진지를 구축한 그들은 4월 11일 새벽, 638고지 아래쪽에 위치한 기갑연대 제1중대 기지를 습격하고 19번 도로를 차단했다. 제1중대는 1970년 7월, 미군으로부터 안케고개의 작전책임을 인수하면서 638고지 북쪽 하단의 600고지에 중대전술기지를 구축하고 ‘소도산기지’로 명명했다.

638고지에는 1개 소대를 파견했다. 미군 주력의 철수에 따른 조치였다. 그러나 한국군도 머지않아 철수할 것으로 보고 1971년 8월, 638고지에 파견된 소대를 철수시켜 철군 준비와 함께 교육훈련 위주로 전환했다. 그 후부터 638고지에 대한 경계는 점차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북베트남군이 공세를 시작한 1972년 3월말에는 1개월 이상 수색정찰도 하지 않았다.

그런 취약점을 이용해 북베트남군 제12연대가 638고지에 침투해 아군 경계부대가 철수하면서 방치해두었던 폐자재를 활용해 1개월간의 공사로 강력한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1개 분대 규모로 제1중대 기지를 습격하면서 안케전투가 시작됐다. 다행히 제1중대 기지를 습격한 적 침투부대는 사전에 발각되면서 사살 및 격퇴되었다. 그러나 안케고개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적의 규모와 기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 도로정찰중 적 기습받아 부상자 속출

안케고개가 차단되자 연대는 4월 12일 아침, 수색중대를 투입해 도로정찰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색중대는 적의 기습으로 2명의 소대장 등 7명이 전사하고, 중대장 등 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연대장은 제3중대를 증원해 적의 근거지로 판단되는 638고지를 공격하게 했다. 그때부터 638고지를 향한 공격은 매일같이 계속됐으나 아군의 피해만 계속 늘어날 뿐 진척은 없었다.

18일에는 제6중대와 제1연대 제8중대를 측후방에 투입하고 제3중대와 수색중대가 정면에서 공격했지만 고지를 탈환하지는 못했다. 이어서 22일부터는 임동춘 중위가 소속된 제2중대가 전면에 나섰다. 그때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드럼통에 흙과 모래를 채워 고지를 향해 굴러 올리면서 엄폐물로 이용하게 했다. 그러나 나무뿌리, 바위 등이 산재해 있는 능선에서 무거운 드럼통을 굴려 올리는 것이 쉽지 않아 오히려 피해만 입고 말았다.

   
▲ 육군보병학교에 설치된 고(故) 임동춘 대위의 동상

◇ 적방커 격파위해 앞장서 공격하다 호국의 별로...

638고지 공격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을 때 임동춘 중위가 앞장서서 수류탄을 투척하며 적의 1선 벙커를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임중위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렇지만 임중위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불편한 다리로 공격을 계속해 5개의 벙커를 폭파시켰다. 그러나 공격의 돌파구를 마련했던 임중위는 날아오는 적의 집중포화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호국의 별로 산화하고 말았다. 임동춘 중위의 전사로 제2중대의 공격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평소 책임감과 신앙이 투철했던 임중위의 활약으로 아군의 집중포화에도 거머리처럼 붙어있던 적의 1선 벙커를 격파할 수 있었다.

임중위의 용전분투는 638고지 점령의 바탕이 되기에 충분했으며 목숨을 바쳐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정신의 귀감이었다. 정부는 임동춘 중위의 살신성인 정신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고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부여했다. 그의 모교 육군보병학교는 그의 동상을 세워 많은 후배장교들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 전투 교훈

수도사단은 1972년 춘계대공세로 안케고개를 점령한 북베트남군 제3사단 제12연대를 16일간에 걸친 혈전 끝에 격멸하고, 안케고개를 되찾았으며, 19번 도로를 개통시켰다. 따라서 “지대 내에 침투한 적 부대를 격멸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으나 문제점이 많았던 전투였다.

특히 1972년에 접어들면서 작전활동을 소홀히 한 결과, 북베트남군 1개연대가 638고지에 잠입해 강력한 진지를 구축한 사실을 1개월 동안이나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638고지 일대를 회복하는데 급급해 적의 규모도 알지 못한 채, 병력을 축차투입하면서 단순한 정면공격을 반복한 결과 많은 피해를 자초했다는 교훈을 남겼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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