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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한국과 베트남'<25>… 파병과 한국 정치5부-베트남 파병이 한국에 미친 영향
  • 최용호 소장
  • 승인 2013.07.2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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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약기반 탈출 돌파구... 정치안정 등 기대이상 성과

1961년 5월 박정희 군사정부가 집권했을 때 대한민국의 위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은 125달러인 북한의 70%수준인 82달러에 불과했다. 정치체제 역시 북한의 김일성이 확고한 지도체제를 구축해나가고 있었지만 당시 박정희 정부의 집권 기반은 허약하기만 했다. 지금의 상황과는 정반대였다. 남한의 서민들은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해 ‘보릿고개’라는 용어가 회자되고 있었다.

김일성은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자신감을 배경으로 남북관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위협에 전전긍긍하는 처지였다. 박정희 정부에게는 뭔가 획기적인 돌파구가 필요했다. 미국의 지원을 얻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미국에 내밀 카드가 필요했다. 그 카드가 젊은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베트남파병 제안이었다.

◇몇차례 우회적 표현 후 박 의장 방미 때 파병 제안

박정희 군사정부의 주미 대사로 임명된 정일권은 1961년 6월 30일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 “한국 병사들은 미국 병사들과 같은 전선 참호에서 침식을 같이하며 나란히 싸웠습니다. 한국은 결코 미국과 한국이 같은 운명체(Riding the Same Horse)였음을 잊지 않을 것이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양국의 공통된 목표를 위해서 한국인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을 제안한 것이다.

이어 7월 26일 박정희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공한을 보내 “우리 역시도 평화를 원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전쟁이 강요된다면, 대한민국은 싸움에 참여할 미국의 첫 번째 동맹국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역시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을 우회적으로 제안한 것이었다. 그 후 11월 14일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국은 잘 훈련된 100만 명의 인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은 베트남에 한국군을 보낼 수 있다.”라고 보다 확실하게 베트남파병을 제안했다.

   
▲ 제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발표하는 박정희 대통령(1963. 12. 17)

◇강력한 반공정책 실천 자유우방 신뢰 얻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 정부가 기대했던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국내정치의 안정기반을 구축함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반공위주 정책을 표방하고 실천한 결과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으로부터 신뢰를 획득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배경으로 국방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트남전쟁 특수(特需)를 통해 유입된 외화를 활용해, 의욕적인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 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선거 결과였다. 1963년 10월 15일, 군사정부가 민정이양을 위해 준비했던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때 집권여당의 박정희 후보는 총 유효투표의 46.65%를 얻어 45.1%를 얻은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불과 156,000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이어서 1963년 11월 26일에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의원정수 175석 중 110석을 얻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67년 5월 3일, 제6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당시는 5만여 명의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베트남 특수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빛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였다. 선거결과 집권여당의 박정희 후보는 유효투표의 51.4%를 획득하여 40.9%를 획득한 야당의 윤보선 후보에게 116만여 표의 큰 차이로 승리했다. 이어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부정선거 시비가 있긴 했지만, 175석 중 129석을 집권여당이 차지했다. 그 결과 박정희 정부는 더욱 자신감을 갖고 국방력 증강과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급격한 성장이 ‘3선개헌-유신채택 배경‘ 부정적 시각도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파병에 따른 국민적 신임을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북한의 남침위협으로 위기설이 난무하던 시기를 헤쳐 나가며, 1962년부터 시작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성공리에 마쳤다. 그리고 1967년부터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효과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경제적 도약을 위한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반면 베트남 파병이 국내정치에 미친 부정적인 요인도 없지는 않았다. “베트남 파병을 통해 급격하게 성장된 제3공화국의 정치적 입지와 경제발전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여금 ‘3선 개헌’과 ‘유신체제’를 채택하게 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또한 한국이 지원했던 남베트남 정부가 1975년 4월 30일, 패망함으로써 파병의 명분에서 손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남베트남 패망은 박정희 정부가 얻고자 했던 성과를 거둔 뒤의 일이었으며, 그 성과가 워낙 막대했기 때문에 반대요인을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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