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베트남 파병이 한국에 미친 영향

미 일방적 주도 관계서 상호 협상관계로 바뀌어

6·25전쟁 직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비대칭조약이었다. 미국의 방기를 우려한 한국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조약의 비준과정에서 상원 외교위원회가 ‘외부의 무력공격을 받았을 경우로 한정하는 조항을 추가’한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승만의 북진통일 시도에 연루될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성립된 한미군사동맹체제는 국가대 국가의 대등한 동맹이라기보다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해 나가고, 한국은 미국의 뜻에 따라가는 형식의 ‘미국주도형 동맹체제’였다.

◇ 전투부대 파병계기 한국도 목소리 내기 시작

한국군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파병되기 시작하면서 한국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64년 9월 22일 파병된 140명 규모의 의료지원단과 1965년 3월 16일 2천여 명으로 편성된 건설지원단은 인도적 차원의 파병이었다. 그러나 전투부대의 파병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수도사단(맹호부대)과 제2해병여단(청룡부대)을 파병하기 위한 협상에서 한국은 주한미군 2개 사단의 계속 주둔 보장, 북한 침공 시 미국의 자동개입 보장, 한국군 현대화 지원, 남베트남 시장진출 지원 등을 요구했다. 전투병력 파병이 시급했던 미국은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 정부의 요구조건을 대부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이 파병된 후 미국 정부는 한국군의 유용성을 더욱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제9사단(백마부대)을 추가로 파병하는 협상과정에서 한국의 요구를 대폭 수용했다. 미국 주도의 일방적 한·미 관계가 대등한 관계는 아니더라도 상호협상의 관계로 바뀌게 된 배경이다. 그 같은 변화에 따라 미국은 외교관례를 뛰어넘는 조치들을 잇달아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대한 일체의 전투지원 및 전투근무지원을 책임지는 것은 물론 파병장병에게 일정액의 해외근무수당을 지급하며, 전사·상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것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 대표적 사례로 한국의 파병을 조건으로 미국 정부가 한국에 대한 지원약속을 보증하는 내용의 문서, 일명 ‘브라운각서(서한)(Brown Memorandum)’를 수교한 사실이다.

▲ 한국군 백구부대(해군 수송전단)를 방문한 웨스트모랜드 주월 미군사령관과 채명신 한국군사령관

◇ 미국 정부의 비밀 약속과 브라운 각서

해외에 파병되는 우방국 군인의 수당을 미국 정부가 대신 지급한다는 내용은 물론 파병을 조건으로 약속한 내용을 문서로 수교하는 외교행위는 미국 정부로서도 선례가 없던 일이었다. 따라서 자국의 국민들과 의회로 부터 공격을 우려했던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에 대해 그런 사실에 대해 엄격한 비밀을 유지해 줄 것을 누차 강조했다.

미국 정부의 우려는 얼마 후 현실로 나타났다. 미국 정부가 한국군의 해외근무수당을 부담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 후에 작성된 ‘브라운각서(서한)’가 문제였다. 1970년 2월, 상원(上院) ‘안보협정 및 대외공약소위원회(일명 Symington청문회)’에서 의원들은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때 일부 의원들은 파병된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傭兵)이 아닌가?”라고 질문했다. 그로 인해 ‘한국군 용병론’이 대두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한국군의 베트남파병과 파병된 한국군의 효율적인 작전 및 민사작전 수행은 한·미 상호방위동맹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조성했다. 나아가 한국의 요구를 적극 관철시키면서도 한·미 관계는 최상의 밀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파병카드도 한계가 있었다.

◇‘닉슨 독트린’과 양국관계 변화의 계기

베트남전쟁을 매개로 형성되었던 양국의 밀월관계는 1968년 7월 25일, 괌(Guam)에서 발표된 ‘닉슨 독트린(doctrine)’으로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이어서 미국의 로저스(William Rodgers) 국무장관이 1970년 7월 5일, 마닐라에서 열린 베트남 참전 7개국 외상회의에 참가하고 있던 최규하 외무부장관에게 ‘주한 미 제7사단의 철수 방침’을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이어 1971년 3월 미국은 한국의 반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제7사단의 철수를 강행하면서 한·미 관계는 새로운 시련을 맞았다. 한미동맹에서 한국의 위상을 구축하고 한국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는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을 대체할 새로운 카드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한국의 경제발전이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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