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베트남 파병이 한국에 미친 영향

아스팍-참전국 정상회담 주도 국위 선양 계기로

1966년 6월 14일,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각료회의(ASPAC, Asian and Pacific Council) 제1차 총회가 열렸다. 한국, 일본, 타일랜드, 말레이시아, 필리핀, 자유중국, 남베트남,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9개국의 회원국과 옵서버로 참가한 라오스 등 총10개국 외무장관이 참석했다.

◇ 한국 외무장관이 아스팍 의장 선출, 외교 폭 넓혀

한국 정부가 주도하고, 미국이 지원한 아스팍(ASPAC)은 제1차 총회에서 한국의 이동원 외무부 장관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평화와 자유, 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참가국들이 상호 협조하고 단결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중국을 겨냥해 지역 내에서 대기권 핵실험을 반대했다. 공산침략에 대항하고 있는 남베트남을 지지했다. 이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도 아스팍의 참가를 권유하고, 한국의 남북통일 정책을 지지했다. 지역 내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도 촉구했다

아스팍은 서울총회에 이어 제2차 총회를 1967년, 방콕에서 개최하는 등 1972년까지 매년 1회씩 개최됐다. 그러나 1972년 서울총회를 끝으로 더 이상의 회의를 갖지 못했다. 그 이유는 변화된 국제적 정세로 인해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스팍에 참가하고 있는 9개국 중 6개국이 남베트남에 파병하고 있는 국가였다. 따라서 아스팍은 자연스럽게 반공위주 단체임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바뀌면서 중국을 봉쇄했던 정책을 수용하는 정책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중국이 국제연합(UN) 정식회원으로 가입해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장제스(蔣介石)의 자유중국은 축출됐다.

이 같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한국 정부는 아스팍을 이념적 차원에서 중립을 표방하는 국제기구로 계속 존속시킬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아스팍이 중국에 대항하는 지역협의체로 비춰질 것을 우려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회원국들이 아스팍에서 탈퇴할 뜻을 표명함에 따라 아스팍은 1973년도 총회에 합의하지 못한 채 무기 연기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아스팍은 회원국들이 공식적으로 탈퇴를 표명하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소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팍은 1960년대 한국이 시도한 능동적 외교의 거보(巨步)였으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한국 외교의 폭을 크게 넓혀준 사례였다.

▲ 1966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제1차 아스팍 총회 모습

◇ 베트남 참전국 정상회담 제의해 성사, 영향력 키워

한편 한국은 베트남 파병규모 2위 국가로써 남베트남 참전국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그 결과 1966년 10월 24일,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미국, 한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타일랜드, 남베트남 등 7개국 정상이 참가한 제1차 회담이 열렸다. 한국이 회담을 제안한 목적은 대외적으로 연합국의 단결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하고 있던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정책결정 과정에 한국이 파병규모에 걸맞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1차 회의에서 베트남전쟁의 대응방식에 대해 한국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등이 주장하는 온건론에 반대하고, 남베트남, 타일랜드 등과 함께 강경대처 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공동성명에 ‘참전국가들의 개별행동 금지’를 규정하는 조항을 삽입하도록 했다. 이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참전국들과 협의를 강제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한국은 제2차 정상회담을 1968년 2월, 서울에서 열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1967년 12월, 오스트레일리아의 홀트 수상이 갑자기 서거(逝去)함에 따라 참전국 정상 대부분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따라서 제2차 회담은 자연스럽게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열렸다. 회담방식은 장례식 분위기를 고려한 결과 전체회담 없이 각 국가별 양자회담으로 대체했다. 이때 박대통령은 존슨 미 대통령과 단독회담을 갖고, 한반도 안전보장 문제를 집중 논의했다.

그 후 베트남 참전국 정상회담은 상설화 되지 못하고, 각 국가별 여건에 따라 개별회담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1968년 4월 18일, 호놀룰루에서 존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1969년 8월 22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베트남전쟁 대처 방안과 한국의 안보 및 경제 지원을 집중 논의 했다.

이와 같이 세계무대에서 내세울 게 없었던 1960년대의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규모의 국제회의를 제의하고 성사시켰다. 이와 같이 한국이 미국과 연례적인 정상회담을 갖는 등 세계무대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배경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기인한 것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결과적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을 강화하고, 국위를 선양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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