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베트남 파병이 한국에 미친 영향

실전 경험-예비군 창설 등 안보강화-방산체제 갖춰

군대는 항상 전투위주 사고방식을 견지해야한다. 군대의 전투경험은 전투력의 핵심적 요소다. 그러나 한국군 전투부대가 파병되던 1965년도 후반기가 되면서 전투경험자는 영관급장교 이상 일부계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투경험을 위해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가들은 많은 예산과 장비를 투입해 실전과 같은 훈련을 거듭함으로써 전투경험과 유사한 효과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의 경제적 능력과 여건을 고려할 때 실전과 같은 훈련 역시 쉽지 않는 과제였다.

◇풍부한 전투경험이 북한군 휴전선 침투성공율도 줄여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연인원 32만여 명의 전투경험은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특히 한국과 유사한 이념(ideology)대결과 함께 정규전과 비정규전이 혼합된 양상의 전투 경험과 미군이 제공한 최신 무기의 운용능력 배양, 미군 및 남베트남군과 연합작전을 통한 협조된 작전 능력 배양 등은 한반도의 전쟁 상황에서도 필수적인 요소들이었다.

특히 베트남전쟁은 대부분 중대급 이하 소규모 부대에서 이루어지는 수색 및 매복 작전 위주의 작전으로 소부대 전투기술 습득에 매우 중요한 기회였다. 이 같은 사실은 베트남전쟁 경험자들이 휴전선에 배치되면서부터는 북한군의 침투 성공률이 급감했다는 통계로도 증명된다. 또한 광범위한 전술책임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중요지역에 설치 운용했던 중대 전술기지 전술을 응용한 주둔지 기지화 전술 역시 여건에 따라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전술이었다.

▲ 우리나라가 독자 개발한 K1A1전차, 2000년에 실전 배치됐다.

◇북한 특수부대 청와대 기습 계기 자주국방력 강화

1968년 1월 21일 발생한 북한군 특수부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과 이틀 뒤의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발목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전장이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사태 수습에 급급했다. 그 과정에서 자국의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에 비해 청와대 기습 사건을 더 소홀히 취급함으로써 한국 정부의 감정을 자극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고려치 않고, 독자적으로 평양까지 진격 한다”는 대북 보복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미국은 애그뉴 부통령을 특사로 파견해 한반도 안보공약을 재천명하고, 군사적 지원을 다짐하면서 한국의 반발을 무마하려 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미국의 권유를 무시할 수 없었으나, 미국의 방위공약에 대해서는 상당한 회의를 갖게 되었다.

1.21사태 이후 한국정부는 국가의 안보를 미국에 의지한 채 ‘선(先) 경제개발, 후(後) 자주국방’을 추진하던 정책으로부터 우선순위를 바꿔 자주국방을 우선과제로 채택했다. 그리고 베트남의 한국군을 철수시키지는 않았지만, 추가 파병을 중지하고,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미국의 지원을 더욱 강력히 요구하면서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 자동소총 이어 각종화기 양산, 방위산업 괄목 성장

이어 정부는 250만여 명의 예비군을 경장비로 무장하는데 필요한 기본화기 및 장비와 긴요 비축용 탄약을 제조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이어 화포와 전차를 자체 생산하는 방위사업 발전계획을 수립했다. 이런 계획은 미국의 지원 없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국 정부를 설득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오랜 동안 계속됐다.

그 결과 향토예비군이 창설된 직후인 1968년 5월 27일, 워싱턴에서 열린 제1차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한국군의 자위력 강화를 위해 한국에 M16 자동소총공장을 건설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그 후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1972년에 생산시설을 완공하면서 양산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77년 상반기부터는 순차적으로 야포, 박격포, 무반동총, 로켙포 등 각종 화기의 양산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500MD 다목적 헬기, 산악용 경장갑차, 이어 초계정 건조, 미사일 정비창 건설, 항공기 정비창 확장 등 괄목할만한 성장이 이루어 졌다.

1978년 4월에는 전차가 국산화되어 양산체제에 들어갔다. 9월에는 한국형 지대지 중거리 유도탄을 개발해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에는 전투기와 한국형 전투함, 잠수함까지 제작하게 되었다. 그 후 M16 소총을 한국 실정에 맞는 K1, K2 소총으로 개발했고, 방독면과 방탄 헬멧, 그리고 통신장비, 발칸포 등을 개발했다. 또한 탄약 및 화약 생산시설을 건설함으로써 방위산업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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