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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한국과 베트남'<30>… 파병과 경제발전5부-베트남 파병이 한국에 미친 영향
  • 최용호 소장
  • 승인 2013.08.1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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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기간 8년 직-간접 효과 50억달러, 오늘날 富의 초석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다른 점도 있지만 닮은 점도 많다. 한민족에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전쟁이 일본에겐 기회였다. 반대로 베트남전쟁은 한국에 기회를 제공했다. 한미관계는 물론 정치·외교·국방 분야와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베트남파병 직전인 196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로 140달러의 북한과 비교해 70%수준이었다. 연간 수출총액은 1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9,300만 달러에 불과했다. 5,000억 달러를 넘어선 지난해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이다. 그 계기를 베트남파병이 만들었다.

◇ 장병수당 80% 의무적 국내 송금-경부고속도로 건설비로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국군을 파병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경제적 효과는 다양했다. 달러로 계산한다면 어림잡아 50억 달러에 이른다. 미국의 직접적인 원조와 간접 지원, 남베트남 전쟁특수 활용, 그리고 국내기업과 근로자의 남베트남 진출에 따른 효과 등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베트남파병을 조건으로 한 미국의 원조다. 6·25전쟁 시기 최고수준에 달했던 미국의 대한 원조는 점차 감소되는 추세에 있었다. 1958년 이후부터는 원조액이 급감했으나 베트남파병을 계기로 다시 증가되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의 군사원조 증가액은 년 평균 1억 달러를 상회하며, 9년 동안 약 10억 달러 정도의 추가 군원이 제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한국군에게 지급된 해외근무수당 등이다. 1964년 당시 한국군 병사는 월평균 1달러 정도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해외에 파병된다면 별도의 비용이 필요할 것이었다. 1차 파병이었던 의료지원단과 태권도 교관단 140명에게는 3개월분의 파병경비 일체를 한국이 부담했다. 그러나 그 비용이 국군 전체 국방비의 0.1%수준이었다. 1965년 3월 건설지원단 2천여 명을 파병하게 되자 한국 정부의 능력으로는 파병 경비를 부담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미국이 모든 파병경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개인에게 지급되는 해외근무수당도 미국 정부가 부담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의 원칙은 1day/1dollar였다. 즉 계급과 직책에 관계없이 1인당 하루에 1달러씩의 해외근무수당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많은 협상을 거쳐 1966년 7월 최종적으로 합의된 금액은 월단위로 병장 54달러, 상사 75달러, 소위 120달러, 소령 165달러, 준장 210달러, 중장 300달러였다. 장병들은 수당의 80%를 본국의 가족에게 의무적으로 송금했다. 송금된 달러는 원화로 계산해 가족에게 전달됐다. 그렇게 확보된 금액이 2억5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정부는 파월장병들이 극히 일부만 사용하

셋째, 파병된 국군의 부대운영을 위해 미국이 지출한 비용이 10억 달러에 달한다. 그 중 급식비, 피복구매비 등의 상당부분이 국내로 유입됐다. 넷째, 전쟁특수를 활용해 남베트남에 수출한 상품대금이 10억 달러 수준에 이른다. 다섯째,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과 기술자들의 국내송금 등과 기타 획득된 달러를 포함시켜야 한다.

   
▲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상징인 경부고속도로

◇ 당시 50억달러는 50년간 수출총액에 해당하는 거금

당시 50억 달러는 1963년~1964년을 기준으로 할 때 50년의 수출총액에 해당한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36년간 지배와 핍박을 당한 후 장기간에 걸친 교섭 끝에 얻어냈던 대일청구권자금과 비교해도 쉽게 알 수 있다. 1965년 6월 지루한 협상 끝에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된 후 받았던 대일청구권자금은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3억 달러로 모두 합해 8억 달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본이 빌러준 돈 5억 달러와 모든 배상금을 면제해주는 조건으로 제공한 금액이 3억 달러의 무상원조였던 셈이다.

베트남파병에 의한 간접적 효과는 50억 달러를 넘어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은 1990년대 외환위기를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러나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의욕적으로 추진한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외환위기의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 위기를 베트남에서 반입된 외화가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국의 차관 및 투자 증가, 국내기업의 베트남 진출에 따른 국내경기 활성화는 부수적인 효과다.

당시 한국인의 활동무대는 한반도 남쪽에 국한되어 있었다. 해외방문 경험자는 극소수였다. 그러나 베트남 파병을 통해 32만여 명의 장병이 비록 전장이긴 하지만 해외방문을 경험했다. 국군의 파병과 활동을 소개하는 기사, 영화, 드라마 등으로 국민들에게 해외진출에 대한 꿈을 심어 줬다.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 이어진 중동의 건설시장 진출은 베트남 파병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오늘날과 같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계기를 베트남파병이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용호 전쟁과평화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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