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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전체 46,817건)
[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17) 공유수면 매립
서울시는 한강변에 새 제방들을 쌓고, 기존 제방은 강 쪽으로 더 들여 다시 쌓으면서 확보한 택지를 팔아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이른바 ‘공유수면 매립공사’사업이다. 기업.종교단체.고위 장성 등도 큰 이권사업임을 알고 달려들었다. 1962년 제정된 공유수면매립법에 따라 한강변에는 크고 작은 공유수면 매립공사가 진행됐다. 동...
  |  2004-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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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16) 5.16 광장
1970년 10월 말 “여의도 도면을 가지고 서울시장이 들어오라”는 청와대 지시가 내려왔다. 부랴부랴 달려간 양택식 시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여의도에 대광장을 만들라. 이른 시일 내에 계획을 세워 올리라”고 지시했다. 梁시장이 갖고 간 도면에 朴대통령은 직접 붉은 색연필로 구획선을 그었다. 길이 1.35㎞, 폭 2백80...
  |  2004-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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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15) 시범아파트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김현옥 시장이 물러나고 양택식 시장이 부임했다. 梁시장의 당면 과제는 바닥 난 시 재정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梁시장이 부임하면서 나는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서울시 기획관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서울시 재정 상태는 ‘제때 봉급을 줄 수 있을까’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
  |  2004-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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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14) 여의도 개발
요즘 젊은이들은 한강을 변하지 않는 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년내내 강 폭이나 수량이 비슷하기 때문이다.그러나 30년 전만 해도 한강은 노량진 쪽으로 붙어 가늘게 흐르다가 홍수 때만 넓어졌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곳곳에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선거유세 등 대중집회 장소로 사용되곤 했다.한강 하류 용산·마포 나루터에서 당...
  |  2004-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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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13) 한강 개발 계획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1966년 4월 서울의 인구는 3백60만명이었으며, 국민의 1인당 소득수준은 1백15달러 정도였다. 그 뒤을 이은 양택식·구자춘 시장이 시장직을 떠난 78년 12월 서울의 인구는 7백82만명, 1인당 국민소득은 1천3백30달러였다. 이 세 시장이 재임한 12년9개월간 서울시의 인구는 4백22만...
  |  2004-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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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12) 남산 서울타워
남산 정상에 있는 높이 2백36.7m의 서울타워(사진)는 기공 6년 만인 1975년 8월 중순 완공됐다. 남산이 해발 2백43m이니 서울타워 꼭대기까지는 4백80m에 이르는 셈이다. KBS 등 3개 방송국의 송신탑으로 사용되고 있는 서울타워가 세워진 가장 큰 목적은 북한 방송의 전파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 타워...
  |  2004-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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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11) ‘서민의 발’ 전차
1899년 5월 17일 처음 서울시내에 등장한 전차는 1968년 11월 30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확히 69년 6개월 13일 간 시민의 발노릇을 했다. 건양 원년(1896년) 인천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두명의 미국인 콜브란·보스트위크는 고종의 홍릉(명성황후의 능) 나들이를 보고 전차 도입을 생각했다. 이들은 가마를 ...
  |  2004-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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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10) 나비작전
문명의 요람인 도시의 뒷골목에는 ‘매춘’이라는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매춘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적은 없다. 기생과 관비가 있었지만 이들은 매춘부는 아니었다. 일제가 유곽(遊廓)을 지정하고 공창(公娼)제를 도입했다. 광복 후 미 군정이 이를 폐지한데 이어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도 매춘을 금지했다. 그...
  |  2004-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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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9) 서울 요새화 계획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사건이 이른바 ‘1.21 사태’다. 인왕산 아래 필운동에 살고 있던 나는 그날 밤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다. 김신조 등 수십명의 무장간첩이 휴전선을 넘어 세검정 삼거리에 이를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당시 서울의 방위망이 뚫...
  |  2004-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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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8) 세운상가
일제가 서울에 남기고 간 수많은 상처 가운데 하나가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조성한 소개공지(疏開空地)였다. 폭격으로 인한 불이 도시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군데군데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폭 40~50m의 빈터를 만든 게 소개공지다. 회현동~서울역 구간의 퇴계로와 서울역~충정로 구간의 의주로 등...
  |  2004-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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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7) ‘불도저’ 김현옥
1966년 끝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춘궁기가 사라졌다. 봄에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60~64년에는 연평균 5.5%, 65~69년의 경우 연평균 11.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같은 고도성장에는 급격한 도시화가 뒤따랐다. 도시화 현상을 성장동력으로 전환시킨 대표적인 사례가 ‘한강의...
  |  2004-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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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6) 인구집중 억제
시굴은 시골의 서울사투리다. 1950년대 서울에 올라온 나는 이 ‘시굴띠기’란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다. 당시는 시골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완전히 이방인이었다. 광복과 한국전쟁기에 많은 피란민이 서울에 정착하고, 그 이후 60년대에 농촌 이탈자들이 서울에 모여들면서 서울 사람들의 배타의식·거부반응이 시골 사람을 대할 때 ...
  |  2004-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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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5) 워커힐 건립
도시의 모습이 정치와 깊은 관계가 있다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세계사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도시는 정치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조선왕조가 한양(서울)으로 천도한 것부터가 정치적인 결정이었다.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이 느리지만 조금씩 복구되고 있던 시기에 4.19, 5.16 등 엄청난 정치적 변화를 가져온 ...
  |  2004-03-0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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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4) 전후 복구 사업
한국전쟁 전에 서울 시내 주택가 골목에서 집을 찾는 것은 고역이었다.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집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일제 초기 도심 일부지역의 도로가 직선화되고 하수도 시설이 정비됐으나 뒷골목은 소방차도 다닐 수 없는 꼬부랑길이었다. 이런 서울의 중심부가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됐다. 전후 ...
  |  2004-02-2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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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부동산] [서울만들기] (3) ‘선비’ 장훈씨
많은 사람이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전후에 곧바로 도시계획을 세워 재건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지금의 소득 수준에서나 가능한 주장일 뿐이다. 전쟁 직후 1953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으며. 대다수 서울 시민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한때 동료였던 박유서(한국전쟁 당시 서울특별시 공보계장...
  |  2004-02-2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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