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식 정치평론가/21세기한국연구소장

정치에는 인간관계가 상당히 중요하다. 한국의 전통적인 인간관계는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예의를 차리는 연고주의였다. 그래서 고향과 가문은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2013년 정치 뉴스의 상당 부분을 김한길 대표가 채웠다. 그러나 그는 결코 2013년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그는 여당 대표인 황우여 대표를 빼고 박근혜 대통령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2자회담을 꿈꾸었다. 그 준비를 위하여 ‘장외투쟁’을 펼쳤다.

장외투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국정원과 국방부 사이버사령부의 댓글문제였다. 필자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민주당의 장외투쟁이 심각한 전략적 오류로 비쳐졌다. 국회를 방기하고 떠난 민주당은 민생 활동마저도 할 수 없는 처지를 스스로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한길 대표는 ‘한국에서 사라진 민주주의’ 회복을 주장하였다. 만약 위기를 맞은 민주주의였다면, 당연히 긴급구제 방안을 구사해야 맞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하는 문제라면 이것은 엄청난 전략과 전술, 그리고 길고 긴 시간을 동원해야 한다.

김한길 대표의 비틀대는 전략적 행동에도 문제는 있었다. 필자는 민생과 민주주의의 확보작업은 함께 가야 한다고 본다. 어떤 경우에도 국회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민생구제 작업을 하면서, 댓글 문제의 해결을 시도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민생에 신경을 쓰지 않는 정당이라는 오명이 붙어버렸다. 그때쯤 민주당 지지율은 11월30일~12월1일 리서치뷰의 조사결과 13.8%로 떨어졌다.

김한길 대표는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와 함께 3자회담을 가졌다. 3자회담에서 김한길 대표는 열심히 이야기를 했지만, 정답은 나오지 않았다. 만약 김대표의 논리대로라면 장외투쟁보다 더 심각한 투쟁, 즉 단식투쟁에 돌입해야 했다. 그러나 김한길 대표는 “다시 천막당사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당시에 이미 국민 여론은 민생국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김한길 대표는 장외투쟁의 가치를 스스로 무시하고, 국회로 돌아왔다. 김 대표는 지조 없는 행동을 선택하였다. 이후 국회는 여야 간의 밀고 당기는 정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그 정쟁의 와중에 민생국회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국회에는 많은 법률안이 잠자고 있었다. 얼마 전 입권권 문제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34개의 법률안을 무더기로 통과시켜 버렸다.

이런 비틀거리는 처방전을 내기까지 그가 살아온 인생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건국대 정치외교과를 졸업하였고, 당시 그는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이후 그는 문학사상사의 소설부문 신인상을 받고, 이어령 교수의 딸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김한길 대표는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자로 일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 김철의 고향 선배인 강원룡 목사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김 대표는 입국하여 사무총장 서리가 된다.

그때 김대중 총재가 TV 토론에 임해야 했는데, 그 문제에 대한 전문가로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김한길 대표는 문학적 재능은 있었지만, 그러나 그의 문학과 정치활동에 일관성은 없었다. 사실주의, 리얼리즘 계통의 소설을 쓰기보다는 [여자의 남자]에서 보듯이 연애와 권력의 유착 사례를 잘 보여줄 뿐이다.

결국 정치의 목적은 투쟁을 넘은 통합이다. 통합을 위해서는 무한정 투쟁만해서는 안된다. 그의 출세 배경은 따지고 보면 한국 권위주의 시대까지 이어진 연고주의가 그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일관성을 가지고 길게 투쟁하는 데는 극히 서투른 정치인이기도 했다. 이제 그의 시대는 가고 있다. 이제는 공천 과정에서부터 대중의 객관적인 인정을 받아야 하는 좀 더 개명한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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