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태국발 亞 외환위기 재연 우려 고조

[일간투데이 조창용 기자]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재연인가.

지난 23일(이하 현지시간)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가 폭락하자 금융시장에서는 1997년 태국 바트화의 급락이 불을 댕긴 아시아 외환위기 사태의 재연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아직은 신중론이 지배적이지만 전문가들은 환난 이후 지난 20년간 신흥시장이 승승장구한 게 중국의 초고속 성장세와 미국의 경기부양 의지 덕분이었다는 데 주목했다.

최근 두드러진 중국의 성장세 둔화와 미국의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이라는 변수가 결국 신흥국 위기 재발 여부를 좌우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이다.

◇페소 폭락, 亞 외환위기 바트 폭락 '닮은꼴'
파이낸셜타임스(FT)는 25일 페소 급락이 1997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페소의 자유낙하와 이에 따른 신흥국 화폐의 동반 하락이 17년 전 태국에서 아시아로 번진 외환위기 때와 닮았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페소 가치는 지난 23일 하루 동안 15% 급락한 달러당 7.9페소를 기록했다. 하루 낙폭으로는 아르헨티나가 1000억달러에 이르는 채무에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 이듬해인 2002년 이후 가장 컸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이튿날 자본통제 완화 등 긴급대책을 발표하면서 시장은 다소 안정을 되찾았지만 달러 대비 페소 가치는 1주일 새 18%나 추락했다.

아르헨티나 쇼크는 당장 다른 신흥국으로 확산됐다. 터키 리라, 러시아 루블, 인도 루피, 남아프리카공화국 랜드, 브라질 헤알 등이 일제히 약세로 밀렸다. 리라는 23일 중앙은행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지난주 4.8% 하락하며 사상 처음으로 달러당 2.3리라를 돌파했고 랜드 가치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10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다.

이로써 24개 주요 신흥국 화폐 가운데 지난주 강세를 유지한 것은 중국 위안, 바트, 대만달러 등 3개뿐이었다.

태국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필리핀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한국에도 엄청난 후폭풍을 남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1997년 6월30일부터 같은 해 12월31일까지 외국인 자금이 대거 이탈하면서 달러 대비 바트 가치는 48% 추락했다. 같은 기간 인도네시아 루피아, 말레이시아 링깃, 필리핀 페소는 각각 44%, 35%, 34% 급락했고 6개월 새 원화 가치도 48%나 하락했다.

◇"아르헨은 '특별 케이스'"...같은 듯 다른 신흥시장
그러나 상당수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에서 페소에 대한 과격한 매도세가 발생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진단한다. 신흥시장 전반의 문제로 볼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르헨티나에 대해서는 특히 과도한 경상수지 적자와 빈약한 보유외환이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이 여파로 물가상승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약 25%)에 이르자 사람들이 페소를 처분하고 달러를 사 모으게 됐다는 설명이다.

아르헨티나의 외환보유액은 지난해 초 400억달러에서 최근 290억달러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올해 들어서만 10억달러 넘게 줄었다.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국부유출을 막기 위해 취한 자본통제 정책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고 지적한다.

닐 시어링 캐피털이코노믹스 신흥시장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이유를 들어 "아르헨티나는 아마도 특별한 경우가 될 것"이라며 "신흥시장의 새로운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이는 각 나라의 상황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흥시장을 개별 취약성 등에 따라 5개의 그룹으로 나눴다.

이 중 가장 취약한 그룹에 아르헨티나와 우크라이나, 베네수엘라가 포함됐다. 셋 다 경제정책을 잘못 써 위기를 자초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두 번째 그룹은 '분수에 맞지 않게 산 나라'로 신용 거품과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로 특징됐다. 터키 남아공 인도네시아 태국 칠레 페루 등으로 테이퍼링 충격에 특히 취약하다는 평가였다.

다음은 거품의 유산으로 고전하는 나라들이다. 헝가리, 루마니아 같은 동유럽 국가들이다. 이들은 미국의 테이퍼링보다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긴축에 충격을 받기 쉽다고 시어링은 지적했다.

이어 네 번째 그룹으로는 국내 경제정책으로 고전하고 있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브릭스'가 지목됐고 마지막 그룹에는 한국, 필리핀, 멕시코 등 수출 비중이 큰 나라들이 포함됐다.

◇中 성장세 둔화·美 테이퍼링이 최대 변수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이번 아르헨티나 쇼크에 신흥시장 전반에 대한 우려가 반영됐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미국의 테이퍼링과 중국의 성장세 둔화라는 악재에서 비롯된 우려가 가장 취약한 곳 가운데 하나였던 아르헨티나에서 터져버렸다는 것이다. 28-29일 열리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추가 테이퍼링 결정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 가운데 중국의 제조업 관련 지표가 6개월 만에 위축세로 돌아선 게 직접적인 악재가 됐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NYT)는 25일 미국과 중국에서 일어난 경제적 전환이 신흥국을 비롯한 글로벌 금융시장을 강타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20년간 신흥시장을 떠받친 중국의 성장세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경기부양 의지가 약해지면서 역풍이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뉴욕증시 대표지수인 S&P500지수는 24일 2.1% 급락하며 한 달여 만에 1800선 아래로 밀렸다. 주간 기준으론 2012년 6월 이후 최악의 한 주였다.

NYT는 신흥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테이퍼링보다 중국 변수가 더 클 것으로 예상했다. 테이퍼링 우려로 지난해 여름 요동쳤던 신흥국 금융시장은 FRB가 지난해 12월 테이퍼링 결정을 내린 뒤에는 오히려 흔들림이 덜 하지만 중국 경제 성장세가 더 둔화되면 브라질과 남아공등 중국에 대한 원자재 수출 비중이 큰 나라들에 큰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올해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제 성장이 가속화할 전망이기 때문에 신흥시장에 새로운 위기가 시작됐다고 서둘러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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