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끝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춘궁기가 사라졌다. 봄에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60~64년에는 연평균 5.5%, 65~69년의 경우 연평균 11.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같은 고도성장에는 급격한 도시화가 뒤따랐다. 도시화 현상을 성장동력으로 전환시킨 대표적인 사례가 ‘한강의 기적’이다. 이를 실천에 옮긴 사람이 김현옥 서울시장이었다.

도시를 연구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66년은 金시장이 등장한 해로도 기억할 만하다. 그는 우리나라의 지방행정·도시개발사에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함께 남겼다.

경제성장과 동시에 서울은 인구 집중으로 인한 교통난·주택난 등의 도시문제가 심각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윤치영 서울시장은 속수무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66년 4월 당시 부산시장이었던 김현옥씨를 서울시장으로 전격 임명했다.

김현옥씨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에 미친 사람’이다. 그의 별명은 부산시장 때부터 ‘불도저’였다. 무슨 일이건 한번 결심하면 밀어붙이는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은 광기에 가까울 정도였다.

金시장이 부임한 66년 4월 당시 서울 인구는 3백50만명, 차량 수는 1만7천대였다. 자가용 승용차는 5천대에 불과했다. 대다수 시민의 교통수단은 시속 20㎞의 전차와 1천3백여대의 버스였다. 출퇴근 시간대에는 버스나 전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정류장마다 아우성이었다.

전차 종점이 있던 독립문과 마포·돈암동·청량리·왕십리가 서울 시가지의 끝이었다. 시 외곽으로 나가면 도로 폭이 8~10m로 좁아졌다. 도심에서 갈현동·미아리·광나루까지 왕복하는데 지프형 차량으로 꼬박 하루가 걸릴 정도였다.

金시장은 도로 신설·확장을 주요 내용으로 한 교통난 완화대책을 서울시정의 중점 과제로 삼았다.

그는 4.19, 5.16 등의 기념일에 수십 건의 건설공사 기공식을 열었다. 예컨대 66년 5월16일 하루에만 홍제동~갈현동과 돈암동~미아리 구간의 도로 확장공사 등 모두 10건의 건설공사와 가압펌프장 16곳, 공동수도 94곳의 기공식을 가졌다. 그는 기공.준공 테이프를 끊은 가위를 시장실 벽에 걸어 놓았다. 가위들이 시장실 벽을 거의 채웠을 무렵 그는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서울 시내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주요 간선도로는 대부분 金시장 재임 때 넓혀졌다. 사직터널을 뚫고 청계고가도로를 놓았다. 남산1·2호 터널과 마포대교도 첫삽을 떴다. 1백44개의 보도육교와 북악스카이웨이, 강변도로도 만들었다.

金시장이 수많은 건설공사를 한꺼번에 벌리자 건자재 부족 파동이 일어났다. 전국 공사장에서 시멘트·철근·골재가 동 난 것이다.

경제기획원 장관이 건설공사 중지 또는 속도 조절을 지시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결국 중앙정부가 부랴부랴 시멘트.철근 등 자재를 외국에서 들여와 사태를 수습했다.

70년 4월 8일 11명의 희생자를 낸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물러나기까지 만 4년 4일 동안 金시장은 하루도 쉼없이 일에 미쳐 지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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