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5월 17일 처음 서울시내에 등장한 전차는 1968년 11월 30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확히 69년 6개월 13일 간 시민의 발노릇을 했다.

건양 원년(1896년) 인천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두명의 미국인 콜브란·보스트위크는 고종의 홍릉(명성황후의 능) 나들이를 보고 전차 도입을 생각했다.

이들은 가마를 탄 많은 신하가 뒤따르는 고종의 홍릉 행차에 당시 돈으로 10만원 안팎의 경비가 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차를 이용하면 경비와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전차 운행을 위한 전차·전기 부설권 허가를 황실에 요청했다.

이에 따라 황실에서 75만원을 투자한 한·미 합작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면서 서울시내에 전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1909년 이 회사의 경영권이 일본 기업으로 넘어갔다.

일제 때 전차 운행은 엄청난 수익사업이었다. 일제 초기 서대문~청량리, 종로~남대문~원효로4가, 서대문~마포 구간 등 3개에 불과했던 노선이 점차 늘어났다.

왕십리까지 가는 을지로선과 남대문∼신용산∼노량진 노선, 서대문∼영천∼창경궁 앞∼돈암동 노선 등이 잇따라 신설됐다.

한국전쟁 전까지 전차는 서울 시민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50년 서울 시내버스는 50대 정도. 승용차는 몇 백대였으므로 대다수 시민은 전차로 출퇴근하거나 등하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60년대 들어 전차사업은 곤경에 빠졌다. 우선 정부가 전차요금을 회사 맘대로 올리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레일·차량 등의 시설 노후화와 늘어나는 인건비도 큰 부담이 됐다.

여기에 미군이 한국전쟁 중 사용했던 지프·트럭들을 민간인에게 싸게 팔았으며, 국산 버스·택시도 생산되기 시작했다.

55년 6백22대였던 서울의 시내버스가 60년 1천9백4대, 65년 2천4백46대로 급격하게 늘었다.
차량이 증가함에 따라 주요 간선도로 곳곳에 정류장을 두고 평균시속 7㎞의 거북이 운행을 하는 전차가 장애물로 전락했다.

서울에서 전차가 사라진 데는 당시 유럽·미국·일본 등 선진국이 전차를 철거하고 있었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외국의 대도시에서 전차가 없어진 이유는 전철이 놓여졌기 때문이었다.

반면 지하철 등 전차를 대체할 수 있는 대중교통시설을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진 서울시내 전차 철거는 성급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외국 대도시의 교통정책과 비교해 볼 때 10∼20년 이른 조치라는 것이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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