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한 1966년 4월 서울의 인구는 3백60만명이었으며, 국민의 1인당 소득수준은 1백15달러 정도였다.

그 뒤을 이은 양택식·구자춘 시장이 시장직을 떠난 78년 12월 서울의 인구는 7백82만명, 1인당 국민소득은 1천3백30달러였다.

이 세 시장이 재임한 12년9개월간 서울시의 인구는 4백22만명이 늘어났고 국민의 1인당 소득은 12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와 같은 경제의 고도성장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인구의 서울 집중이 진행된 것이다.
집은 아무리 지어도 모자랐고, 길은 아무리 넓혀도 부족했다. 수돗물의 증산은 수요를 따르기 어려웠고, 무허가 건물은 헐어도 헐어도 계속 늘어났다.

김현옥·양택식·구자춘 세 명의 시장은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시민의 생활을 토요일·일요일도 없는 일을 통해 이겨나갔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하부구조를 거의 마무리지었다.

김현옥 시장의 재임기간 동안 월간지 ‘도시문제’ 등을 발간하며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 일했던 나는 양택식 시장이 취임한 뒤 서울시의 기획관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직급으로는 다른 국장과 같은 2급이었지만 기획·예산·통계·법무 등 시(市)행정 전반에 걸쳐 관여했고, 양시장의 많은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게 됐다. 이 때문에 당시 시청에서는 1·2 부시장 위에 있는 ‘0부시장’이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당시의 시장들이 얼마나 ‘일에 미쳐’ 또는 ‘일에 묻혀’ 지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김현옥 시장은 재임 4년간 해마다 그 정열의 초점이 달랐다. 처음 부임했던 66년에는 교통소통에 주력해 지하도 공사와 육교 공사, 도로 확장 등에 주력했다. 다음 해에는 세운상가·낙원상가·파고다 아케이드 등 도심부 재개발 사업에, 재임 3차년도인 68년에는 한강개발사업을 시작했으며, 69년에는 남산 1.2호 터널 등 서울 요새화계획에 주력했다.

훗날 ‘강변1로’로 불리는 ‘제1한강교~영등포간 연안도로’의 기공식은 67년 3월 17일 거행됐다. 3월에 시작한 한강 연안도로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던 8월 김시장은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즉 새로 생기는 강변도로와 기존의 제방 사이에 2만4천평이라는 ‘새로운 택지’가 조성됐던 것이다.

제방을 종전보다 안으로 들여쌓은 결과였다. 2만4천평의 땅은 20동의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넓이였다.

이때 김시장의 머리를 스친 것이 여의도 1백20만평을 개발하면 엄청난 택지가 새로 생기고 그것을 팔면 한동안 구상했던 여러가지 일들을 한꺼번에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평소에도 그런 편이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면 그 광기는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

“한강개발계획을 세워라. 그 내용은 첫째, 여의도에 제방을 쌓아서 가능한 한 많은 택지를 조성한다. 둘째, 여의도와 마포·영등포를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한다. 셋째,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제방도로를 연차적으로 축조함으로써 한강홍수를 방지하고, 자동차가 고속으로 달릴 수 있도록 한다.” 결심이 선 김시장의 명령은 추상같았다.

이에 따라 한달여 만에 한강개발계획이 수립되고,”여의도를 시가지로, 4백62억원 투입, 한강개발 3개년 계획 마련”이라는 기사가 일제히 보도된 것은 67년 9월 22일이었다.

김시장은 한강개발과 여의도 건설을 ‘조국의 시대적 과업이며 꼭 이룩해야 할 민족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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