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 크지만 허물 안고 떠난다"

'작은 거인'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며 퇴진을 천명하고 나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 회장은 22일 오전 삼성그룹 본관 지하 1층 국제회의실에서 계열사 사장단과 전략기획실 고위임원진 등 30여 명이 배석한 가운데 삼성그룹 경영쇄신안을 발표하고 "모든 허물을 떠안고 일선에서 퇴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이날 그룹 쇄신안 발표에 앞서 “이번 삼성 사태에 대한 모든 법적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며 “할일도 많은데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을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어 “오늘날의 삼성이 있기까진 무엇보다 국민여러분과 사회의 도움이 컸다. 앞으로 더 아끼고 도와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워주시길 바란다”고 역설했다.

이 회장은 그러면서 "그동안 저로부터 비롯된 특검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하다"는 말로 대국민 사과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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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회장 퇴진은 '제3의 창업' 위한 승부수
그룹 최고 경영진 사이에서도 예측 못해
'불법 경영집단' 이미지 벗기 위한 고육책

이날 발표된 삼성 그룹 경영쇄신안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이건희 회장의 퇴진이다.

따라서 세간에선 왜 그가 경영일선 퇴진이란 초강수를 들고나온 것일까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학수 부회장은 이날 기자회견 뒤 기자들과 가진 일문일답에서 "이건희 회장이 퇴임의사를 처음 비친 것은 지난 3월 초였다"고 전했다.

이 회장의 퇴진이 그동안 한 달여에 걸쳐 치밀하게 준비돼온 것이란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의 퇴진은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회장 퇴진이 본격 검토되기 시작한 시점은 삼성특검이 수사결과를 발표한 지난 17일 이후부터.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 이재용 전무 등 세 사람간의 논의 끝에 지난 21일 어렵게 결정됐다는 후문이다.

이 회장의 퇴진은 이 부회장을 제외한 그룹 최고 경영진 사이에서도 전혀 예측치 못했다.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의 퇴진을 예상하는 일부 언론보도가 있었긴 하나, 이 회장의 퇴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삼성그룹 고위관계자는 "그룹 수뇌부의 퇴진이 있을 순 있으나 가부는 이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 두 사람의 머리 속에만 들어있을 뿐"이라며 "내가 보기엔 이학수 부회장의 퇴진 가능성은 99% 없다"고 확언했다.

이 회장은커녕 이학수 부회장의 퇴진조차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게 하루 전 삼성그룹 최고위층의 분위기였다.

이 회장이 스스로 퇴진하는 초 강수를 선택한 것은 삼성그룹이 현재 처해있는 현실이 이학수 부회장을 비롯한 전문 경영인들의 교체만으론 타개키 어려운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삼성은 그동안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투영돼 왔다. 삼성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데 대해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한편으론, 특히 국내에선 불법 경영집단이란 부정적 이미지를 동반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불법 대선자금과 안기부 X-파일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 정치권과 정부부처, 사회단체, 언론계등 사회각계에 삼성의 로비가 뻗쳐있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존재해왔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 회장으로선 삼성이 이처럼 두 가지 상반된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 자체가 참담했을 것"이라며 "삼성의 환골탈태를 위해선 자신의 경영일선 퇴진이 가장 상징적인 조치이자 고육책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 회장은 지난 11일 삼성특검 조사 직후 기자들에게 "이번 사태를 계기로 그룹 경영체계와 저를 포함한 경영진의 쇄신 문제도 깊이 생각해 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그룹은 그러나 이 회장의 발언 직후 "이건희 회장의 발언이 그룹 수뇌부의 경영일선 퇴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회장 자신의 퇴진 의지가 워낙 강해 고위 경영진에서 끝내 만류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회장의 사임은 책임 통감 차원의 2선 퇴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제3의 창업을 위한 승부수로 해석되고 있다.

타고난 경영인이자 승부사인 이건희 회장이 이번 조치로 삼성의 내외적인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하고 글로벌 초 일류기업으로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는 한편 안으론 3세 경영체제로의 전환을 순조롭게 진행시킬 수 있을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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