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추석명절이 엿새 앞으로 다가왔다. 명절은 즐거운 날이지만, 불편하고 불안할 수 있다. 명절비용의 분담, 대답하기 껄끄러운 신상에 관한 질의문답, 각종 음식준비와 뒤처리, 본가와 처가에 대한 인사 및 방문순서 등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게다가 조상에 절하는 종교적인 문제까지 발생되면 명절이 명절이 아닐 수 있다. 다른 문제들은 제법 성숙하게 인격적으로 눈치껏 처리할 수 있지만, 제사 때 절하는 문제는 내심에만 머물 수 없는 영역이기에, 갈등이 불가피하다.

제사를 중히 여기는 입장은 장손(남)으로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절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고 못할 짓인지 납득이 안 된다고 한다. 반면 교인들은 조상에 대한 절은 우상숭배이기에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며 이를 반대한다. 신앙과 효가 충돌하며, 전통과 갈등한다.


기독교인과 전통수호자 간 갈등

귀감이 될 만한 아름다운 실화 하나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불자인 시아버지와 독실한 크리스천 며느리간의 이야기다. 시아버지가 시집 온지 한 달 밖에 안 되는 며느리에게 돌아가신 시어머니 제사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며느리는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어떤 분이고,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를 언제 만나 어떻게 사랑했으며,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과 취미 등을 매일 전화를 드려 물어보면서 꼬박 한 달 동안 제수음식을 준비하였다. 한 달간 오간 통화 속에서 며느리 자신의 신앙적 어려움을 조용히 토로했음은 물론이다. 갓 시집온 며느리의 음식솜씨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인터넷을 통해 배우고 익히며 노력한 결과 제삿날 선보인 음식은 인터넷 제사상 차림과 거의 동일했다고 한다.

제사를 끝낸 후 시아버지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앞으로는 추모예배로 제사를 갈음해도 좋다고 하셨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살아계신 시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헤아려 정성껏 제사를 준비하는 며느리의 모습을 보면서, 시아버지는 감동을 받은 것이다.

기독교인들과 전통의식을 존중하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 아직도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지만, 며느리가 보여준, 솔선수범과 진정한 사랑은 신앙적 충돌마저 흡수해버렸다. 교인들이 명절제사를 대할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절하는 것과 관련해 갈등을 빚는 영역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문상할 때다. 지금의 장례문화는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정착돼 있지만, 불과 10여 년 전 만해도, 고인에 대해 절하지 않고 서서 목례로 경의만 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 역시 기독교인으로 성장했고 교육을 받았기에, 조문 시 절하지 않고 서서 기도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런데 늘 드는 생각은, 조문 시 고인에게 절하는 것이 우상숭배인가이다. 상주의 부모님께 경의를 표하는 것에 불과하고 그에게 빌거나 그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사랑·양보로 신앙충돌 넘는 명절

1972년 대법원은 국기경례를 우상숭배로 거부한 고등학교 학생에 대한 제적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수 백 명의 학생이 국기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을 때 이를 당당히 거부한 학생의 양심은 보호돼야지 처벌대상으로 보아선 안 된다. 국기경례거부는 여호와의 증인신도들이 히틀러식의 경례에 반발한 것에서 시작됐다. 국기에 대한 경례(또는 배례)는 국가에 대한 감사와 애국의 표현이지 국기에게 무엇을 비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연령대에 따라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의 주제가 달라진다. 20대는 정체성 정립에, 30대는 삶의 우선순위 정립에, 40대는 삶의 의미 정립에, 50대는 남은 시간 정립에 대해 질문을 한다. 60대는 부고 란에 누가 실렸고, 어떻게 죽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해 하며, 또 사후의 생명은 정말 있을까 고민한다. 나도 금년에 진갑을 맞았으니 사후의 삶에 대해 고민할 시점인데, 천국의 소망을 두고 있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다. 사랑과 헌신과 양보로 신앙충돌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추석명절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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