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광택

오래 전부터 ‘이것만큼은 꼭 봐야지’하던 영화였다. ‘재수 좋은 놈은 도랑에 빠져도 잉어를 바지춤에 달고 나온다’하더니! 뜻하지 않은 횡재였다. 풋덕풋덕 떨어지고 있는 노오란 은행잎처럼 그 영화는 내게 찾아온 늦가을의 금화(金貨)같은 축복이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

■ 죽음도 불사할 '예술 혼'에 소름

이 영화만큼 리얼리티에 대한 광적인 집착에 혀를 내두르게 하는 영화가 또 있을까! 아예 시작 단계부터 감독과 스태프, 그리고 배우들의 자세와 각오가 유독 남달랐다고 한다. 즉 중세 일본의 어느 깊은 산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기로(棄老) 풍습이 주요 내용인데 농민들의 흙냄새를 모르면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들은 3년간 실제로 오지의 그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그래서인지 모든 배우의 얼굴이 송화단처럼, 포청천처럼 햇볕에 잘 그을려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할머니 역으로 출연한 사카모토 스미코는 작은 창고 속의 돌확(돌을 우묵하게 파서 만든 절구)에 이를 부딪쳐 부러뜨리는 연기를 조작 없이 실제로 해내는 열의를 보였다. (그 덕분에 이 영화는 1983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입 밖으로 뚝뚝뚝 떨어져 흘러내리는 피! 그 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뛰어나오는 장면에서는 고만 소름이 와락 돋았다. ‘예술의 혼이라는 게 바로 저런 것이구나!’싶게, 풀죽처럼 느른했던 나의 정신 속으로 한겨울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전율이 밀려들었다. 사카모토 스미코에게 영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일’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온 삶을 걸지 않고서야 어찌 그러한 연기가 가능하겠는가. 끝까지 간다는 것, 어떤 일에 대해 극단까지 간다는 것. 그것은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열렬히 삶을 사랑할 때 나오는 것이 아닐까. 어둠이 내리는 저녁빛을 볼 때처럼 눈물겹다는 느낌과 함께 경외감이 일었다. 아름다움이란 그와 상반되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을 때 더욱 역동적인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 하더니! 그녀는 등불처럼 환히 살아있었다.

■ 인간의 소원은 작을수록 간절한 법

이보다 더한 벽촌이 또 있을까 싶게 영화의 배경은 깊디깊은 산간이다. 가풀막진 산비탈 아래위로 10여 호의 농가들이 오롯하게 자리잡고 서로 옆구리를 비비고 있는 마을이다. 강아지가 꼬리치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하고 반달 같은 초가지붕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의 삶은 서정적인 풍경과는 완전 딴판이다. 식량부족이 어찌나 심한지 최소의 노동력만 남기곤 갓난아이가 아들이면 무조건 내다버린다.(딸은 키워서 판다)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무섭고 어려운 것인지 이 영화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감자 몇 알에 거침없이 여인들은 자신의 몸을 남자에게 내맡긴다. 할머니의 셋째아들과 연정을 나누는 오에라는 소녀가 나오는데 엄마는 벙어리요 형제자매가 유난히 많아서인지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다. 이웃의 감자와 옥수수를 훔쳤다가 오에(그녀는 임신해 배가 부른 상태였음)를 포함 가족 전체가 마을사람들에 의해 생매장을 당한다. 아, ‘어쩌면 생은 울다 가는 것’이요 ‘인생은 시장기 같은 것’이라 하더니!

시인 랭보가 탄식했듯 진정으로 ‘삶은 모든 이가 공연하는 소극’이란 말인가. 스스로 아들의 지게에 실려 깊은 산 속으로 가는 할머니. 봄바람처럼 부드럽기만 한 그녀의 눈길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의 소원은 작은 것일수록 간절하다! <이광택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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