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권세에 의지해 출세하길 바라겠나" 병조판서 혼담 거절 일화로

I-Ⅱ.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신(臣)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라고 유성룡이 선조에게 설명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으며 징비록((懲毖錄)에는 “순신의 사람됨은 맑고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하며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며 그의 속에는 담기(膽氣)가 있어 자기 몸을 잊고 국난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이것은 평소에 축적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순신의 둘째 형인 요신과 동갑으로 자주 어울렸다. 징비록에는 이순신의 집안내력이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비교적 세세하게 기록돼 있는데 이순신은 어린 시절부터 타인에게 구속받거나 싫어하고 영특한 면이 많았다.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도 진(陣)을 치는 놀이를 많이 했는데 아이들이 대장으로 떠받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성년이 된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무남독녀 상주 방씨와 결혼해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이 회(薈). 둘째아들이 울(蔚,나중에 열로 이름을 개명했다)셋째 아들이 면(葂)이다. 이순신은 20세까지는 문과 공부만 했으며 이 덕택에 여러 가지 병법서를 쉽게 이해하고 전투에 응용했으며 조정에 장계를 올리거나 전투상황을 보고할 때 자신이 직접 작성하거나 꼼꼼히 검토했다. 이러한 내용은 난중일기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주 방씨와 혼인 한 이후부터 이순신은 무과를 준비한 것으로 보이며 당시의 무과는 활과 칼 쓰기 등 무예만 중시한 것이 아니라 병법서 같은 이론도 중시했다. 이순신의 나이 32살이 되던 해에 드디어 무과에 급제했는데 이 당시에 사료(史料)에는 활을 잘 쏘아 급제했다고 기록돼 있다. 원래 과거시험은 문과나 무과나 모두 동일하게 28명의 합격자를 선발하는데 동점자가 있을 경우에는 동시에 선발한다.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하던 해도 동점자가 있어 29명이 합격했으며 이순신은 12등이었다. 무과에 합격을 했어도 성적에 따라 직위가 달라진다. 1등에서 3등까지는 갑(甲)과로 종7품, 4등부터 8등까지는 을(乙)과로 종8품이 주어지고 9등부터는 종9품이 주어진다. 이순신은 종9품에 임명되며 처음 받은 직책은 권관(權官)이었다.

관직생활을 하면서 이순신에 대한 일화는 수없이 많이 있다. 당시 병조판서 김귀영이 서자 출신인 자기 딸을 이순신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 당시의 병조판서는 대단한 위치였고 무관인 이순신에게는 최고의 수장인 셈이다. 결혼만 하면 좋은 보직과 출세가 보장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호하게 “내 처음 벼슬길에 올랐는데 어찌 권세 있는 집안에 의지해 출세하기를 바라겠는가?”하면서 거절했다.

또 다른 일화는 병조정랑 서익이 훈련원에 근무하는 친구를 서열을 무시한 채 승진시키려 했다. 이때 훈련원 정무관이었던 이순신은 안 될 일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해 서익의 노여움을 샀다. 서익은 이순신을 불러 질책했지만 이순신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뜻을 굽히지 않고 조목조목 대꾸하자 서익은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랫동안 언쟁을 벌이던 두 사람은 날 이 저물자 서익이 얼굴이 붉어지며 이순신을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이순신의 사람됨이 관료들 사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균의 모략으로 옥고(獄苦)을 치루고 있을 때 이순신의 생사가 불투명했다. 이때 간수가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에게 은밀하게 “뇌물을 쓰면 죄가 가벼워 질 텐 데…”라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순신은 크게 화를 내며 조카 이분에게 “죽으면 죽었지 어찌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해서 살기를 바라겠느냐”하고 호통을 쳤다.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에 굴하지 않고 정도를 주장하는 공직자의 자세와 죽음의 절박함 속에서도 정직함으로 부당함에 대응하는 용기는 현 시대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 (계속)  <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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