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일 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행정학박사

I-Ⅳ. 이순신의 집안사람들

이순신의 집안은 맏형 이희신은 이순신보다 10살이 많았으며 벼슬을 하지 않고 52세의 나이에 일찍 사망했다. 둘째형 요신은 이순신보다 3살이 많았으며 38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으며 훗날 이순신의 공로에 호조참판에 봉직됐다. 아우인 우신도 관직이나 공적을 세운 기록이 뚜렷하지 않으며 형인 순신과의 왕래한 기록은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온양 조씨와 혼인해 슬하에 딸 둘을 두었다.

이순신의 가정을 살펴보면 이순신의 정실인 상주 방씨와 소실로 해주 오씨와 부안댁이 있었다

정실 부인 상주 방씨는 이순신보다 2살 아래였으며 아주 지혜롭고 정숙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부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일화가 ‘방부인전’에 전해진다.
“부인은 어릴 적부터 영민한 품이 어른과 같았다. 12세 때 화적(火賊)들이 안마당까지 쳐들어와 보성공(방부인의 부친)이 화살로 도둑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 했다. 그러나 계집종이 이미 도둑과 내통해 이미 화살을 훔쳐 가지고 나가 남은 화살이 없었다. 그러자 부인이 “여기 있습니다”하고 급히 배짜는 데 쓰는 대나무를 한 아름 안아다 다락에서 던지니 그 소리가 마치 화살묶음을 던지는 것 같아 도둑이 보성공이 활 잘 쏘는 것을 아는지라 화살이 많은 것을 두려워해 놀라 도망했다”라고 쓰여있다.

이순신이 1597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상주 방씨는 당연히 국가의 예에 따라 가장 높은 상훈이 책정됐으며 당시로서는 장수해 80세가 넘도록 살았다. 소실인 해주오씨는 병마우후 오수덕의 딸이며 부안 댁은 윤연의 누이다.

이순신의 자녀들은 정실부인 방씨와의 사이에서 3남1녀를 두었으며 큰 아들 회는 벼슬이 첨정에 이르렀고 원조공신의 녹훈을 받았으며 매사에 반듯하고 일처리가 깔끔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부친인 이순신과 임진왜란 시 종군하다 노량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둘째아들 열은 선조 때 벼슬을 했으나 광해군 때 세상이 어지러움을 한탄하면서 낙향해 시골에 묻혀 지냈다. 시대가 바뀌자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에 임명돼 형조정랑의 벼슬에 올랐으며 맏형인 이회와 같은 원조공신의 녹훈을 받았다.

셋째아들 면은 아버지를 닮아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아 이순신이 매우 아꼈다. 명량해전 직후 마을에 일본군이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일본군 3명을 죽이고 자신은 끝까지 싸우다 일본군의 칼에 사망했다.

이순신과 해주 오씨 사이에서 출생한 훈은 무과에 급제해 이괄의 난 때 한성에서 전사했으며 훗날 병조참의에 봉직됐다. 신은 무과에 급제했으나 정묘호란 중에 전사했다.

이순신의 조카들은 큰형 희신은 진주강씨와의 사이에서 뢰. 분. 번 .완의 4형제를 두었으며 이 중 둘째조카 분은 작은 아버지인 이순신과 함께 종군하면서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이순신 사후에 ‘행록’을 저술했다. 후일에 벼슬이 병조정랑에 이른다. 그 외에도 둘째형 요신이 일찍 사망하자 조카들을 자식처럼 키워 혼인을 시켜 무과에 급제토록 하는 등 집안 어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한 흔적이 여러 가지 사료에서 나타난다. (계속 )  <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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