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Ⅱ-Ⅰ. 공직자의 본분에 충실한 자세

이순신이 관할하는 전라좌수영은 순천, 광양, 낙안, 보성, 흥양을 관할하는 5개의 내륙기지와 방답, 여도, 사도, 발포, 녹도 등 5개의 해안기지를 가지고 있었다. 성곽과 군사시설을 보수하는 등 할 일이 많았다.

채석장에서 돌을 떠오거나 해자를 보수하는 등 독자적으로 추진해야 할 군사적 업무가 많이 있었다.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에 이런 일을 수행하는데 독자적으로 군영을 지휘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이순신은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업무수행능력과 지휘관의 자질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이순신이 처음 전라좌수영에 부임할 때 그리 쉽지 않았다. 사간원의 반대로 부임이 취소된 것이 무려 네 번이다. 이는 시기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일년전 조선을 구한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것은 파격적이고 극적이었다. 어려서부터 이순신을 잘 알고 있는 유성룡의 도움이 많았음을 여러 가지 사료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전라좌수사에 부임하고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순천부사 권준과 사도첨사 김완은 이순신의 상관이었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낙안군수 신호는 당시53세로 47세였던 이순신 보다 무려 6살이나 많았고 무과급제도 이순신보다 9년이나 먼저 등과한 선배였다.

그 외에도 이순신의 주위에는 연배가 높거나 상관이었던 사람들이 많아 상황에 따라서는 이순신의 벼락출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지휘함에 있어서 한 치의 문제점도 드러나지 않았다. 상관의 잘못된 지시에 대해 직언을 해 마찰이 있기도 했지만 자신이 지휘하는 군영만큼은 비정하리만치 원칙과 군율에 충실했다.

● 1592년 1월 16일 성 밑에 사는 석수 박몽제는 석수로 선생원의 쇠사슬 박을 돌을 뜨는 곳에 갔다가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끼쳤으므로 곤장 80대를 쳤다

● 1592년 2월 14일 새로 쌓은 해자가 무너져 석수장이들에게 벌을 주고 다시 쌓게 했다.

● 1592년 5월 3일 내일 새벽에 출동할 것을 약속하고 장계을 썼다. 여도 수군 황옥천이 자기 집으로 도피한 것을 잡아다가 목을 베고 걸었다

이순신은 군령을 어긴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법대로 집행했다. 전라좌수군이 전투를 위해 출동하려 할 때 미리 겁을 먹은 여도 수군 황옥천이 도망하자 이를 잡아다가 목을 베고 장대에 목을 걸어 만인 앞에 군법의 준엄함을 보여주었다. 이순신 자신도 모든 면에 솔선수범하되 법규에 어긋난 것에 대해서는 준엄하고 엄격하게 처리했다. 부임한 이순신이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을 때 일부 지방관리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고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이순신이 평소 원칙과 군율을 강조하다 보니 일부 백성과 군사들은 불평도 있었다. 나대용을 시켜 거북선을 제작하고 재주 있는 부하들을 시켜 화포를 제작하고 군사들을 조련하는 등 기본에 따랐다.

‘지금 같은 태평한 시대에 무슨 성(城)이 필요합니까?’ ‘우리고을은 큰 강이 있어 왜적이 쳐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성 같은 방어시설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을 어렵게 하는 축성공사 같은 부역을 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당시 조정에 올린 장계를 보면 선비와 백성들이 어떻게 이순신을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칙대로 실행에 옮긴 이순신의 행적이 빛을 발했다. <유인일 행정학박사·제천시통일안보전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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