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옥포해전 : 비장한 마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의 최초의 해전이다. 그 당시의 상황은 육지에서의 전투는 거의 패전하는 상황으로 조선의 수도 한성이 함락됐으며 선조는 의주로 피난 중이었다. 육지에서의 싸움은 연전연패였고 백성들은 기댈 곳 없는 암담한 시기였다.

조선은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며 전쟁과는 인연이 없는 세월이 한동안 지속됐고 무(武)보다는 문(文)을 숭상했다. 이런 시류는 숱한 전쟁의 위협에서 특히 일본의 조선침략을 예고하고 있었음에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정신까지 좀먹게 했다. 소규모의 여진족과 왜구에 승리했던 것을 위안으로 삼아 이를 전체인양 자부하던 나라였다.

어느 것 하나 준비된 것이 없었다.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짙어지자 부랴부랴 장비와 물자를 점검했다. 그러나 숫자상으로만 있었지 실제 없는 것이 많았고 그 마저도 관리가 부실해 효용가치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육군이나 수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조선을 이끌던 선조는 포용력과 배려심, 통찰력과 소통능력 또한 부족했다.

조선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삼도에 수군을 배치했으며 수군체제는 좌수사, 우수사로 조직됐다. 경상도 좌도수사로 박홍, 우도수사 원균, 전라도는 좌도수사 이순신, 우도수사 이억기였다. 옥포해전이 최초의 해전이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바다에서의 전투는 이미 진행중이었다. 일방적인 조선수군의 패배였다.

일본군이 부산으로 상륙하기 위해 700여 척이 부산 앞바다를 향했다. 그 당시 경상도에 주둔하던 수군은 전쟁 준비가 덜 돼있었다. 일본군이 침략했을 때 이를 발견하고 대응하지 못했다.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한 전투였다. 경상우수영에는 전라좌수영보다 훨씬 많은 군선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100여척이라는 숫자를 보아도 객관적으로 증명이 됐다. 이충무공 전서의 기록에도 경상우수영의 전력이 판옥선 44척, 협선29척 등 74척을 포함해 포작선 등을 포함하면 100여척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도 그럴 것이 경상도 지역은 왜구의 침탈이 빈번했던 곳으로 평상시에 이를 격퇴할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순신이 거느리고 있는 함대가 첫 출전할 당시 85척이었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보유하고 있던 함대가 25척이었다. 이 상황만 보더라도 경상도에도 최소한 전라도와 비슷한 100여척은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육지에서는 일본군이 쏘는 조총소리만 듣고도 도망가는 군사가, 바다에서는 부산 앞 바다로 공격해 오는 일본 군선을 보고 도망 나온 지휘관도 있었다. 기선을 제압당한 전투에서 승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전장의 승리는 장병의 사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의 운명의 한 판 승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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