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 변호사

문서내용 인식못한채
속아 서명해도 인정


매수인 A는 토지 소유자이자 매도인인 B와 매매계약을 체결하면서, B에게 토지거래허가 등에 필요한 서류라고 속여 근저당권설정계약서 등에 서명·날인하게 하고 인감증명서를 교부받은 다음, 이를 이용해 B소유 토지에 A를 채무자로 하는 근저당권설정계약을 체결하여 돈을 차용했다.
이에 매도인 B는 A를 사기 및 사문서 위조 등으로 고소했는데, A의 기망행위로 인해 착오에 빠진 결과 의사와 다른 내용의 처분문서에 서명 또는 날인한 경우, B가 문서의 구체적 내용과 법적 효과를 인식하지 못하고 서명·날인행위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면 사기죄의 처분의사가 인정될까?

사기죄는 형법 제347조에 해당하는 죄로 사람을 기망해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할 경우 성립하는 범죄다. 사기죄가 성립하려면, 기망행위-착오-피해자의 처분행위-재산상 이익의 취득이 필요하며 각 단계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처분행위는 비록 법문상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사기죄의 기술되지 않은 구성요건요소로서 행위자의 기망행위에 의한 피기망자의 착오와 행위자 등의 재물 또는 재산상 이익의 취득이라는 최종적 결과를 중간에서 매개·연결하는 한편, 피해자의 처분행위를 이용하는지, 이를 매개하지 않고 직접 탈취하는지 여부에 따라 사기죄와 절도죄를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처분행위는 피해자가 인식하고 한 것이라는 점에서 처분의사를 전제로 한다.

위의 사례와 같이 피해자가 기망 당해 어떠한 내용인지도 모르고 근저당권설정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을 이른바 ‘서명사취’라고 하는데, 이 경우 피기망자에게 처분행위와 처분의사가 인정될 것인지에 관해 최근 대법원에서 판례변경을 통해 다른 해석을 내렸다.

‘서명사취’사기는 기망행위에 의해 유발된 착오로 인해 피기망자가 내심의 의사와 다른 처분문서에 서명 또는 날인함으로써 재산상 손해를 초래한 경우로, 그 하자가 의사표시 자체의 성립과정에 존재한다. 이처럼 피기망자가 행위자의 기망행위로 인해 착오에 빠진 결과 내심의 의사와 다른 효과를 발생시키는 내용의 처분문서에 서명 또는 날인으로 처분문서의 내용에 따른 재산상 손해가 초래됐다면 그와 같은 처분문서에 서명 또는 날인을 한 피기망자의 행위는 사기죄에서 말하는 처분행위에 해당한다.

과거 판례가 기망당해 하자있는 의사표시에 기해 서명을 했더라도, 그 서명으로 인해 내 토지가 근저당권설정계약에 담보로 이용된다는 결과까지 인식할 것을 요했다면, 변경된 판례에서는 문서의 구체적 내용과 법적효과를 인식하지 못한 채 속아서 서명을 한 경우에도 처분의사가 인정돼 사기죄가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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