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미 한국장애인가족문화연구소장·교육학 박사

장애자녀부모가 된 워킹맘은 일과 장애자녀양육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일과 장애자녀양육을 병행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결정을 내려줄 수는 없다. 자녀의 장애라는 문제가 복합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대부분 기관의 초기상담에서는 장애자녀의 양육을 위해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치료나 교육과정이 오랜 시간 소요 된다는 것, 일을 가지고 있으므로 경제적,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덜 겪을 수도 있다는 조언을 해준다.
지니(가명, 필자의 자녀)가 2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그 문제를 돌아보면 일찍 일을 접었던 그 결정을 나는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일과 지니의 양육을 병행했다면 나의 특성으로 보아 내가 개인적으로 감내해야 했던 심리적인 충격과 현실적인 문제들을 직장에서 일을 하는 순간에도, 퇴근해서 집에 있는 순간에도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을 하느라 혹시라도 시간을 지체하게 됨으로 놓치게 되는 치료나 교육이 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심리적인 압박감의 탈출구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스트레스의 원인이 상존하고 있는 한 내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가있든 나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그 중압감이 나를 주저앉게 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처한 상황이 현실이 맞는지를 늘 확인하면서 서둘러 치료나 교육을 받고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자는 생각만이 간절했었다.

몇 차례의 초기상담을 받으며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아득해하고 있던 어느 날 신문 귀퉁이에 있는 언어치료 광고를 보고 전화를 했다. 아주 친절하게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 H장애인복지관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H장애인복지관에서는 지니가 아직은 어리니, 만3세가 되는 달에 놀이치료부터 시작하자고 했다. 다행히 처음 시작한 놀이치료에 지니가 좋은 반응을 보였다. 치료실에 있는 작고 앙증맞은 피규어로 꾸며진 예쁜 모형 방을 앞에 두고 선생님의 시범과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작은 인형에게 옷과 신발을 입혀보고 벗겨보기도 하며 방을 꾸미는 놀이에 집중하였다. 3회기가 지났을 때 치료선생님이 희망을 주었다.

“지니는 힘이 있어요. 지니는 잘 될 것 같아요.”
“첫날에 청소기 소리를 싫어하더니, 두 번째 날에는 괜찮아졌어요.”

지니의 반응을 기다리며 무작정 흘러가는 시간이 불안해, 뭔가 소통의 실마리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낮은 책상위에 이면지, 계절이 지난 달력이나 다이어리를 펼쳐놓고 지니를 품에 앉히고 연필을 쥐어준 지니의 작은 손 위로 내 손을 포개어 선긋기 놀이를 시작했다. 천천히 대상을 말로 표현하면서 선긋기에 이어,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그리다가 동그라미에서 사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동그라미에 얼굴, 눈, 코, 입, 귀를 그려 넣는다. 다시 손을 대면 더 구체화 되어 사람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점점 세밀하게 묘사하고, 이런 저런 옷을 입혀보기도 하고, 장식을 하고, 색을 입히면서 그리는 대상에 대해 단어와 문장을 구사하면서 활동을 확장해 나갔다. 필자는 그림으로 지니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장애아동의 치료와 교육은 소통관계 형성으로서 시작이 된다.


정은미 한국장애인가족문화연구소장·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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