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가

“지금 집으로 출발할거니까 준비해요” 매주 토요일이면 거의 예외 없이 퇴근 무렵에 아내와 통화했던 내용이다.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 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가 내가 도착하면 냉큼 문을 열고 올라탔다. 대개 뚜렷한 목적지는 없었지만 아무튼 가족과의 즐거운 1박2일 여행은 그런 식으로 진행됐다.

‘아무튼 어디로든 일단 가보자’며 감행(?)했던 이 같은 가족 나들이는 25년 전 쯤 시작돼 7년여 간 계속됐다. 당시만 해도 주 6일을 꼬박 근무해야 했고 일이 꼬이기라도 하면 휴일도 반납한 채 회사로 출근하는게 다반사였다. 평일에도 새벽 별 보면서 집을 나선 뒤 캄캄한 한밤중에야 귀가하는 게 일상이었다.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가질 엄두를 내기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심지어 여름 휴가 내는 것도 눈치가 보였으니 요즘과는 영 다른 세상이었던 셈이다.

결혼 후 제법 오랜 기간은 정말이지 무심하고 한심한 남편과 아빠로 살았다. 월화수목금토요일을 업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린 탓에 지쳤다는 핑계로 토요일 밤부터 월요일 출근 전까지 내내 침대에 파묻혀 있곤 했다. 잠에 취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찾아 먹었던 건 신기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직장 생활을 하다 전업 주부로 변신한 아내는 ‘힘들겠거니’하며 내버려 두었다. 타성은 게으름을 낳고 가족 간의 관계까지도 데면데면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예쁘게 태어난 큰 딸이 아빠 얼굴을 몰라 낯선 사람 대하듯 쳐다보다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으니 할 말 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무리하더라도 주말에 시간을 내서 무조건 서울을 벗어나기로 마음을 다졌다. 이상하게도 첫 여행을 어디로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운행 일지를 기록해 두었더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이 남는 까닭이다. 꽤나 오랜 기간이었던 덕분에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모두 다녀봤다. 충북 속리산 법주사, 경북 김천 직지사, 강원도 속초 등을 둘러볼 기회도 있었다.

크고 작은 추억들이 있지만 특히 전남 부안 채석강에서의 하룻밤은 지금도 뇌리 속에 생생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토요일 오후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채석강을 향해 운전을 계속했다.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시절이라 미리 지도를 봐 두었지만 이리저리 헤매기도 했다. 밤이 깊어지자 아이들은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시트를 넣어 평평하게 만든 뒷좌석에서 잠이 들었다. 아내도 옆자리에서 편안한 꿈나라로 갔다. 문제는 새벽녘 쯤 도착한 현장에서 발생했다.
인근 숙박업소에 빈 방이 전혀 없었다. 낭패였다. 할 수 없이 먼 곳이라도 가려는 심사로 다시 주행을 하는데 사거리 쯤에서 불빛이 보였다. 제법 규모가 큰 옛날 식 구멍가게였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점방을 지키는 할머니께 “잠 좀 재워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여쭸다. 걱정과는 달리 시골 인심은 후했다. 흔쾌히 빈 방을 내주신 뒤 이불과 요까지 챙겨주신 덕분에 단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일요일 오후에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고마움과 흐뭇함이 가슴 속에서 울렁거렸다.

벼락치기 가족여행은 막내가 태어나고 얼마쯤 지난 후에 막을 내렸다. 어느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큰 딸도 은근히 할 일이 많아졌고 아내도 갓난아이 챙기기를 힘겨워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논의를 한 것은 아니지만 마치 묵시적인 동의라도 이뤄진 것처럼 어느 토요일부터 내 차량은 아파트에 주차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불평이나 불만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1박2일 자동차 여행은 끝났다.
이런 저런 대화 끝에 그 때 얘기가 나오자 아내가 한마디 툭 던진다. “좋았었지, 아이들의 머릿속 어딘가에는 여행의 추억이 잠재된 채 남아 있겠지. 세 명 모두 비뚤어지지 않고 별 탈 없이 잘 자라준 것도 덕분인 듯 싶기도 하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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