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인조와 백성의 마음을 따라가다

[일간투데이 정우교 기자] 1637년 1월 30일, 삼전도. 이날 이 곳에서 있었던 일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인조)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 의식 순서를 소리내어 읽는 것)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역사상 치욕스러운 사건 중 하나인 '삼전도의 굴욕'. 조선의 왕, 인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청 태종에게 항복했습니다. 지금부터 병자호란, 그 치열했던 역사를 되짚어가며 왕과 백성들의 마음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참고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조선왕조실록 중 인조 1년 원본. 사진=조선왕조실록 / 국사편찬위원회


■ 반정으로 들어선 정권

우선 인조가 어떻게 왕이 됐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623년 3월 12일, 이귀, 김류 등의 서인세력은 군사를 일으켜 창덕궁을 기습했습니다. 이른바 인조반정의 시작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기록입니다. 광해군 일기에는 이를 '반정'이라고 기록한 반면 인조실록에는 '의병'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상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 기사 中 

반정으로 왕에 올랐기 때문에 그는 매우 불안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당한 왕위계승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또 광해군을 함께 몰아냈던 이들의 ‘공’에 대한 알맞은 ‘상’도 마련해야했기 때문에 굉장히 피곤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분명히 ‘누구는 높은 벼슬을 얻었는데 나는 왜 이것밖에…’라는 식의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테니까요.

실제로 이 논공행상이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해 1624년 제주목사 이괄은 난을 일으킵니다.

그 밖에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등…재위기간 27년동안 인조에게는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중. 사진=네이버영화 / CJ엔터테인먼트


■ 병자호란의 발발…왕은 남한산성으로 떠났다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침략합니다. 정묘호란을 일으킨 지 9년만의 일입니다. 후세에는 이 전후 과정에 대해 인조와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많이 비교하기도 합니다.

조선군은 이 침략에 대해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이때의 일을 인조실록 33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5일 을유 1번째기사.

하늘을 뒤흔든 백성의 통곡소리. 일반 백성들은 근 10년간 2번의 침입을 맨몸으로 견뎌야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을테니까요. 그 긴 시간동안 왕과 조정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변했을지는 불 보듯 뻔하겠지요. 그의 할아버지, 선조가 임진왜란 때 그랬던 것처럼. 

 

 

■ 남한산성에서의 결전…그러나 

남한산성에서의 방어는 치열했습니다. 40여일간 조선군은 결사항전 했습니다. 하지만 식량은 고갈됐고 그해 겨울은 굉장히 추웠습니다. 작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는 이 때의 추위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김훈 소설 '남한산성' 中

또한 인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됐습니다.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해 강도로 향하러 하였다.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산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말이 발을 디디지 못하였으므로, 상이 말에서 내려 걸었다…」 인조실력 33권, 인조 14년 12월 15일 을유 1번째 기사

게다가 1637년 1월 14일, 성위에 있던 군졸 가운데 얼어 죽은 자도 발견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몸도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 놓았던 그해 겨울이었습니다.

다시, 항전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당시 남한산성 안에서는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청과 싸우자는 김상헌의 '척화파'와 일단 싸움을 멈추고 협상을 하자는 최명길의 '주화파'들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김상헌과 최명길, 두 충신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도 지속적으로 엇갈리고 있죠. 

결국 1637년 1월 26일 인조는 항복할 것을 결심하고 다음날 항복문서를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월 30일, 그는 앞서 소개했던 것처럼 왕사(王事)에서 가장 치욕스러웠던 순간의 당사자로 청 태종 앞에 섭니다. 

 

▲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중. 사진=네이버영화/CJ엔터테인먼트


■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항복을 결심한 사람의 속마음을 묻는 것은 어쩌면 멍청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은 수도를 지키지 못했고 신하들은 뿔뿔히 흩어졌으며 백성들은 수년 째 고난을 겪고 있으니, 그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던 왕이 느꼈던 감정은 꽤 무겁고 참혹했을 것입니다. '백성의 아비'가 아니라 백성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도 느꼈겠죠.

다음은 인조가 항복을 결심한 날의 기록입니다. 

「"형세가 이미 막다른 길까지 왔으니,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 그러나 저들이 이미 제궁(諸宮)을 거느리고 인질로 삼고 있으니, 나 또한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6일 병인 4번째 기사 中 

이러한 고민 끝에 인조는 결국 항복을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위의 기록 이후에 이어집니다. 내용을 간추리면 인조는 애당초 결사항전을 결심했지만 이미 사태는 크게 달라졌고 수많은 포로들이 생겼기 때문에 생각을 바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삼전도의 굴욕이 있은 후, 조선의 임금은 돌아가는 청 태종을 배웅했다고 합니다. 작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는 포로들이 구십리라고 표현했죠. 또한 인조실록 34권에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명을 헤아렸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 기사 中

이를 보던 조선의 왕, 인조의 마음도 미안함과 동시에 울부짖는 백성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헤어진 그들은 한쪽은 포로가 되고 또 다른 쪽은 대궐로 돌아갔습니다. 항복으로 끝나버린 전쟁, 하지만 조선의 겨울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용에 기록한 날짜는 모두 음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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