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길 속에 길이 있다<3>

우리나라 왕조가 도로건설에 소극적이다 못해 비관적이었던 이유는 차라리 길이 없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길을 닦아놓으면 결국 외부 침략의 경로만 터주게 되는,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판단에서였다.

남 좋은 일로만 그치면 모르겠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전란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와 백성들의 고통이었다. 자그만치 931회에 달하는 이민족의 침략을 당함으로써 3년마다 '난리'를 경험했으니 '무책이 상책'이란 소신에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무려 931회나 되는 이민족의 침입을 분석해 보면 중국의 한족, 만주족과 몽골과 같은 대륙 방면에서의 침략이 약 54%, 나머지는 일본 왜구의 노략질이었다. 사정이 이쯤되면 우리 조상들이 생각할 수 있는 대비책은 도로의 역기능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이에 과한 일화 한 가지. 조선 초기의 정치가인 양성지(梁誠之)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고관이 우리나라의 산천은 어떠하냐고 물었다. 이에 양성지는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아 큰 하천이 없소. 그래서 홍수가 나도 그리 비참하지 않소"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명나라의 고관이 "해동국(당시 우리나라를 이르는 말)의 도로상태는 어떠하냐"고 묻는 순간, 양성지는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 '이놈들이 또 쳐들어오려고 그러는건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였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의주에서 한성까지 오려면 큰 강을 여덟 개나 건너야 하고 큰 고개를 또 여덟 개를 넘어야 하오"라며 지형이 대단히 험준하다는 걸 거듭 강조했다고 한다.

이민족의 침입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큰 하천이 순식간에 여덟 개나 생기고 지형이 갑자기 험준해졌겠는가. 우리나라의 도로사정을 물은 명나라 고관의 참뜻은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나, 그 말 한마디에 혼비백산해 말 바꾸느라 허둥지둥했을 양성지를 떠올리면 이민족의 침입에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노이로제 상태였는지 능히 헤아려진다.

우리 선조들이 도로건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숙종 때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던 남구만(南九萬)이 후주(厚州)에 진(鎭)을 설치하고 왕께 상소해 진과 연결할 도로를 만들 것을 청하자 왕은 "치도(治道)가 병가지대기(兵家之大忌)란 사실을 모르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도로를 내는 것은 군사적으로 심히 우려하고 꺼려할 일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로써 진과 연결되는 도로의 설치는 무산되고 말았다.

역시 숙종 때 있었던 일이다. 청나라에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오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을 보내 우리나라의 지도를 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다. 이소식을 들은 숙종은 우리나라의 지형이 자세하게 표시된 지도 대신 대충대충 표시된 약식지도를 골라주라고 명했다 하니, 왕조차 외부의 침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강릉의 대관령엔 지금의 국도가 개설되기 전에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지름길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길은 중종 때 고관을 지낸 고형산(高荊山)이 관민을 동원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개설한 도로로, 이 길이 뚫리면서 강릉과 영서 간의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터지고 말았다. 당시 청군이 주문진에 상륙해서 강릉을 지나 이 길을 이용해 단시일에 한양에 당도하고 말았다. 이에 인조는 크게 노하여 고형산의 무덤을 파내라는 어명까지 내렸다는 일이 지금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역민을 위해 길을 낸 일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거늘, 그 길이 적군의 침략로로 사용되는 바람에 결국 무덤까지 파헤쳐지는 수난까지 당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길을 닦는 것에 대한 생각이 이렇게 부정적이었으니 도로 사정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이런 길들이 이방인들의 눈엔 어떻게 비쳐졌을까. 구한말, 러시아 대장성이 발간한 『코리아(KOREA)』에선 왕조시대 우리나라의 도로사정에 대해 "도로에 관한 한 이 지구상에서 제일 형편없는 나라는 코리아다"라고 전제하고 "한국의 도로는 수 세기 동안 단 한 번도 개량한바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가장 도로사정이 좋다는 한양-의주선의 노폭은 장정 네 사람이 옆으로 나란히 선 어깨폭 넓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그것도 노반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조그마한 개천을 통과하면 연결지점을 찾기 힘들다고 쓰고있다.

또한 교량에 대해서도 이렇게 언급하고있다.  "이 나라의 교량은 필요성이 없는 작은 하천에 개설되어 있는데 이것도 대부분이 임시적인 흙다리에 불과해 우마가 통행할 때는 교각이 파괴된다." 덧붙여 개성과 평양 사이는 큰 산이 없는 평야지대인데도 노폭이 좁고 가끔 널찍한 구간이 있으나 그런 곳엔 어김없이 큼직한 바윗돌이 몇개 놓여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 어떤 곳엔 도로상에 빨래판처럼 수많은 홈을 파놓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한국사람들은 '대로(大路)'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이것은 도로가 아니고 북방에서 이민족이 공격해올 때 말발굽이 빠져 부러지도록 한 장치라는 주석도 붙어 있다.

도로에 적의 말발굽이 빠져 부러지도록 하는 장치까지 해야 했을 정도로 적의 공격을 걱정하며 마음 졸였던 우리 민족, 오죽하면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순절한 이병준(李秉俊) 선생은 유서에 이런 말을 남겼겠는가. "우리 나라의 교량이 튼튼하고 도로가 제대로 되어 있었더라면 그나마 우리 국토와 역사는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자니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 이런 고달픈 역사 때문에 제대로 된 도로조차 누빌 수 없었던 조상들의 삶이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