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3·1 운동이 1919년에 일어났으니 내년이면 100주년이 된다. 3.1절을 기념하는 이유는, 3·1 운동과 그 정신을 바로 알아야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역사를 쓸 수 있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역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3·1절 행사는 한낱 과거 역사에 대한 의례적 기념이 되어서도 안 되며, 반일만을 확인하는 행사에 그쳐서도 안 될 것이다.

1910년대의 국내외 상황은 격변의 시대 그 자체였다. 국내적으로, 조선은 왕실의 무능과 사대부의 부정부패, 그러면서도 쇄국정책을 취했기에, 세계의 흐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쇄국은 조선을 스스로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또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자신들의 배를 마음껏 채우던 탐욕의 시기였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가지게 됐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권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자,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1910년 8월 29일 순종은 한일합방조약으로 우리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줬는데, 잊을 수 없는 민족의 치욕, 경술국치다.

■ 근대정신 뿌리로 한국인 저력 원천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세계 모든 약소민족들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였지만, 3·1 운동이 폭발할만한 국제환경은 조성되지 못했다.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젊은 청년 600여명이 적의 심장인 도쿄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대회를 열고, 이광수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도쿄의 독립선언은 신음하고 있던 국내 지식인 학생 종교인에게 크나큰 자극이 됐다. 이어진 3·1 운동은 전 국민이 전국적 규모로, 3개월의 장기간에 걸쳐 이뤄졌다. 대규모 거사를 모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던 총칼의 무단통치 시절, 200만 명이 넘게 참가했다고 하니 전 국민이 봉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 운동은 첫째, 국민을 알게 해줬다. 당시의 국민은 신민(臣民)으로서 지배객체에 불과했는데 3·1 운동은 국민이 지배주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 국민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둘째, 불의에 눈감아서는 안 됨을 보여줬다. 대한은 동방의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였지만 어두운 시대에 좌절하지 않았다. 민족은 대동단결했고, 함성과 외침으로 모든 불의에 용감히 맞섰다. 일제는 수많은 유관순을 감옥에 가뒀지만 그들의 독립의지까지 가두지는 못했다.

셋째, 조선 및 대한제국과 결별했다. 3·1 운동의 독립의지는 한 달 만에 상해임시정부를 출범시켰고, 임시정부는 대한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고 희생했고 헌신했다. 순종이 버젓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왕조복귀 대신 공화국을 선택했다. 3·1 운동을 통해 국민은 전근대적 신민(臣民)에서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넷째, 제국주의의 탐욕을 꾸짖었다. 3·1 운동은 제국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침략자 일본의 오만을 꾸짖었으며, 전 세계 약소민족에게 희망을 줬다. 간디의 불복종운동, 중국의 5·4운동 더 나아가 아시아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 ‘국권피탈’ 다시 냉철하게 돌아볼 때

다섯째, 의로운 분노를 깨우쳐 줬다. 분노를 모르는 자는 스스로 일어서기 어렵다. 당시 아시아 전체를 휩쓸었던 막강한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분노표출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3·1 운동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분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줬다. 의로운 분노는 계산을 모르기에, 엄청나게 큰 힘과 동력을 만들어낸다. 한국인의 힘과 저력은 분노의 원류인 3·1 운동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3·1 정신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한민족 근대정신의 뿌리다. 그래서 헌법재판소는 3·1정신은 우리 헌법의 연혁적·이념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했고,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건국헌법부터 현행헌법에 이르기까지 전문에서 일관되게 3·1 운동을 담고 있다. 3·1 운동은 처음에는 3·1 혁명이었다. 헌법기초위원회 초안도 운동을 혁명이라고 했는데, 축조심의 과정에서 운동으로 바뀌었다. 군주제를 공화제로 바꿨으니 혁명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지금의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여전히 불안하고, 세계는 여전히 탐욕스럽다. ‘미중일러’의 동북아의 흐름은 예나 지금이나 도도하며, 우리의 현재도 동북아의 격랑 한가운데 놓여있다. 우리는 치욕의 한을 남긴 1910년 ‘국권 피탈’의 원인을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3·1 운동은 국권침탈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주독립의 굳건한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더 없이 소중한 우리 모두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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