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길 속에 길이 있다<6>

도로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한 대표적인 민족은 로마인이었다. 도로건설에 총력을 쏟아부었던로마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책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10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이다.

이 책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처럼 그것을 이룩한 민족의 자질을 잘 나나태는 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인프라스트럭처란 사회간접자본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한 마디 단어로 끝내기엔 어쩐지 서운하다.

이 한 단어에 로마인들의 깊은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인프라를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대사업'으로 여겼고 그렇기에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은 국가가 마땅히 담당해야 할 책무로 여겼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인프라스트럭처'의 어원이 라틴어의 맏딸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어라는 것이다. 물론 이탈리아어 발음은 '인프라스트루트라(infrastruttura)'라고 한다. 어쨌든 이 말의 어원이 이탈리아어라는 사실에서도 로마인이 '인프라의 아버지'였다는 걸 유추해볼 수 있다. 많은 인프라 중에서도 로마인이 가장 주력한 부분은 도로였다.

중국 진시황이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 5.000km를 쌓기 시작한 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도로건설의 시발점이었던 아피아 가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도로를 국가가 발전하고 뻗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혈맥으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놀랍다.

아피아 가도가 건설된 건 기원전 312년이다. 그 오래전 건설된 도로의 규모만 봐도 놀랍다. 로마에서 아드리아해에 면한 항구도시인 브린디시까지 총 연장거리가 500km에 달하고 전차 여섯 대가 옆으로 나란히 서서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주변 간선도로도 폭 5~6m에 포장두께가 0.9~1.8m였다 하니 얼마나 크고 튼튼한 도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이 아피아 가도를 '가도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로마식 가도이기도 하지만 로마 가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본보기로 보여준 모범정답 같은 도로였기 때문이다. 로마 가도는 우선 군대의 신속한 이동이 가능하도록 군용도로로서의 기능을 충족시켜야 했다.

두 번째, 로마 가도는 정략적이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아피아 가도에는 참으로 로마인다운 생각이 녹아 있다. 아피아 가도가 지나는 지방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마를 적대시 했던 부족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로마인은 거기에 길을 낸 것이다. 가도 건설에 드는 비용도 로마가 부담했다. 군단병이 칼대신 곡괭이를 들고 도로공사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렇게 건설된 가도는 사람들의 생활을 한층 편리하게 만들었고 이런 과정에서 부족들은 자연스럽게 로마에 동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피아 가도는 처음 건설됐을 당시부터 견고함과 기능성, 미관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철학이었다. 입안자이자 시행의 최고책임자였던 아피우스는 가도가 얼마나 평탄한지 확인하기 위해 샌들을 벗고 맨발로 확인해볼 정도였다고 한다. 그후 건설된 많은 도로들도 이렇게 철저한 공사와 관리를 통해 망을 구축해 나갔다.

이런 로마 가도는 기술적인 면에서도 주목해볼 만하다. 우선 로마 가도의 차도 양옆에는 배수로가 나란히 뻗어있다. 너비 4m, 깊이 1m정도의 차도 안에 빗물이 스며들어 고이는 현상은 도로를 견교하게 유지하기 위해 절대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고대 로마 토목기사들의 좌우명이 '바위는 우리편, 물은 적' 이었다지 않은가. 이 같은 적이 도로를 파손하는 걸 막기 위해 도로 표면이 완만한 아치형을 이루게 해서 빗물이나 눈 녹은 물이 자연스럽게 양옆으로 흐르게 했다. 그리고 그 물은 배수로로 흘러들고, 다시 길 바깥쪽으로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빠져나가게 했다.

로마 가도의 또 다른 특징인 포장도로 바깥에 나무 심는 것을 금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원래 있던 나무조차 베어버렸다. 지하로 뻗는 뿌리가 네 층으로 이루어진 도로의 주요부분을 잠식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시외 가도에도 시내 도로와 마찬가지로 인도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도 로마 가도의 특징이다. 인도가 없는 가도는 길이 산허리를 누비며 지나가는 곳이나터널 내부뿐이었다. 로마인들이 길의 연장으로 생각한 다리에도 비록 좁긴 하지만 인도가 있었다.

이 같은 인도는 길은 되도록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로마인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는 길에서는 마차나 말이 보행자들을 피해서 다녀야 하기 때문에 전속력으로 달릴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보행자에게나 마차나 말을 이용하는 사람 입장에서나 편리하고 안전한 이용자 중심의 도로였던 것이다.

또 한가지 놀라운 점은 로마시대에 이미 실명제를 채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피아 가도라는 이름은 이 가도를 입안하고 그 자신이 총감독을 맡았던 재무간 아피우스의 이름을 따서 지은것이다. 이처럼 로마의 간선도로는 건설지휘자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 그 특징이다.

로마제국이 도로건설에 얼마나 공을 기울였는지는 별도로 도로건설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도로건설단은 기원전 220년경부터 노예와 전쟁포로로 만든 조직으로, 이들은 진격하는 로마군의 뒤를 따라 병사들의 감독하에 도로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장군과 병사들을 환영하기 위해 만든 개선문을 제정로마시대엔 가도를 건설한 황제에게도 바쳤다는 점에서도 도로를 중시한 로마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전쟁에서 적을 무찌르는 것도 국가의 수호와 발전에 이바지하는 길이지만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가도나 다리를 정비하는 것 역시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큼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로 보았던 것이다. 로마제국은 2천 년도 훨씬 전에 기술인력 우대정책이 국가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점을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오늘날 기술인력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해마다 대학 이공계 지원자가 줄어드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은 국가 공무원의 3분의 2가 전문직 기술자이고 중국은 이공계 출신 엔지니어들이 대부분의 정부 요직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가 긴장하고 자성해야 할 부분이다.

로마의 도로정책에서 볼 수 있는 또 한가지 의미있는 부분은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 못지않게 잘 유지하려는 확고한 의지이다. 6세기에 로마의 아피아 가도를 지나간 비잔틴제국의 한 고위관리는 80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로마시대의 도로에 대해 경탄했을 정도였다.

또 이도로가 아스팔트 포장만 덧씌워진 상태로 지금까지도 이탈리아와 로마의 국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만 봐도 로마가 인프라를 만드는 것 못지않게 체계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된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벤치마킹할 부분은, 로마는 어떤 정책이든 무리해서 몰아붙이기보다는 설득하고 유도하는 방법을 썻다는 점이다. 로마가도를 건설할 때도 필요한 용지를 강제로 수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언제나 국민의 입장을 고려했다.

이렇게 로마는 전 세계를 연결하는 방대한 도로망을 갖춘 덕분에 세계의 반을 점령할 수 있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던 때부터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해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던 2세기까지 도로를 만들었다. 북아프리카 연안에 도로를 건설했고 서유럽으로 통하는 도로망도 깔았다. 영국을 점령한 후에는 도버 해협을 건너 런던을 거쳐 요크까지 서유럽의 도로를 연결시켰다.

그런가 하면 이베리아 반도로 남하해 스페인의 톨레도를 거쳐 대서양까지 뻗어 나갔다. 15만km에 이르는 엄청난 도로규모는 다시 로마에 가서 확인하고 싶을 정도다. 당시에 공도가 8만km, 지선이 7만km였던 점을 감안하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현황(고속도로 : 2,9323km, 국도 :1만 4,250km, 지방도 등:7만 4,500km)과 비교해도 엄청난 규모라는 걸 알 수 있다.

600년 동안 적도 길이의 몇 배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한 로마. 그러니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고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정녕 과언은 아니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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