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길 속에 길이 있다<7>

  마르틴 루터는 전쟁을 일컬어 '인류를 괴롭히는 최대의 질병'이라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정치가 이며 외교관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전쟁을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들은 이제 전쟁을 보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나의 의견으로는 좋은 전쟁도 없거니와 나쁜 평화도 없기 때문이다.' 전쟁의 가장 무서운 점은 기존의 모든 걸 무너뜨리고 삶을 송두리째 유린한다는 데 있다. 이처럼 파괴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전쟁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도로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 가운데 하나가 또한 이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병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위해 건설된 도로 가운데 대표적인 길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던 로마제국의 도로와 고대 페르시아의 왕도를 들 수 있다.

페르시아제국은 이란에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이 지배한 고대 오리엔트의 대제국이었다.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란 남서부 지방의 옛 명칭 '파르스'에서 비롯되었으며, 이곳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이 고대제국을 통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페르시아 왕조의 역사는 기원전 815년 무렵, 이란 민족의 한 지파가 우르미아호로부터 자그로스 산맥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내려와 파르수마슈라는 곳에서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700년경엔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아케메네스가 수장이 되었고 그의 아들 테이스페스는 파르수마슈뿐만 아니라 파르스 지방까지 소유하여 안샨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인 키루스 2세는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제국을 일이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많은 동맹국 가운데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시킨 후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또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시켜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 왕조는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우고 철저하게 지켜나갔다. 이는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페르시아 문화를 대표하는 그 유명한 『아라비안나이트』도 페르시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뿐 아니라 인도와 그리스, 아프리카에서 구전되는 이야기까지 포함하고있다. 『천일야화』로도 불리는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페르시아의 왕 샤푸리 야르가 자신이 사냥을 나간 사이 흑인노예와 정분이 난 왕비를 살해한 후 모든 여자를 증오하게 되는 데서 시작된다.

그는 신부를 맞아들인 후 첫날밤만 치르고 다음날 아침에 신부를 죽여버린다. 나라안의 젊은 여자들이 모두 죽거나 피신해 버리자 대신의 딸인 세헤라자데가 자진해서 왕을 섬기며 매일 밤 교묘한 말솜씨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하여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 왕은 세헤라자데를 하루 하루 더 살려두게 되고 이야기는 1001일 동안이나 이어진다. 결국 왕은 세헤라자데의 지혜와 이야기 솜씨에 탄복하여 복수심을 거두고 그녀를 와비로 맞아들여 어진 정치를 베풀게 됐다는 것이다.

어쨌든 키루스 2세 때 서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바빌론을 점령한 것을 계기로 변경국가였던 페르시아는 일약 세계적인 제국의 지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키루스 2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후 한동안 혼란기에 휩싸이기도 했던 제국이 질서를 되찾게 된 시기는 다리우스 1세 때였다. 이 시기는 페르시아제국이 가장 강성했던 때이기도했다. 기원전 521년에 제위에 오른 다리우스 1세는 여러 지방의 반란을 차례로 평정한 후 재정을 정비하고 중앙집권의 강력한 힘으로 인도까지 원정, 전 오리엔트를 지배한 영웅이었다.

그는 수도 수사에서 시작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소아시아 반도 서쪽까지 무려 2,500km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했다. 왕도라 불리는 이 도로는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길로 그 자체가 제국의 위광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페르시아 왕도는 평상시에는 상업도로로, 전쟁 시에는 수송로로 이용됐다.

흔히 '학문에는 왕도(王道)가 없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여기에서 왕도는 페르시아 왕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역전제를 채용해 역마다 역마를 둠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또 걷는데 하루가 걸리는 거리마다 숙소를 마련했는데, 전 노선을 끝까지 가는 데 약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 제도는 오래도록 서아시아 제국의 모범이 됐고 훗날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된 역참제도와도 맥을 같이 한다.

페르시아 왕도에서 눈여겨볼 또 한가지는 주요 기점이 되는 대도시를 직접 통과하지 않고 기술적으로 최단거리를 취함으로써 속도를 높이고 적의 침략으로부터 대도시를 보호하는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대도시와 도로는 별도의 작은 길로 연결되게 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 고속도로의 노선 선정 원리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오래전에 도로의 중요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 같은 첨단 시스템까지 갖추었으니 페르시아가 그 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번영을 누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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