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칼럼
[덕산의 덕화만발] 계산하지 않는 사랑
  • 일간투데이
  • 승인 2018.09.03 15:29
  • 19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구글+
네이버 밴드
네이버 블로그
네이버 폴라
핀터레스트
URL 복사
불가(佛家)에서 중요시하는 것 중의 하나가 보시(布施)입니다. 보시란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佛法)을 베풀고, 자기 뜻을 내세우지 않고 중생을 위하는 것입니다. 보살(菩薩)이 열반(涅槃)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할 여섯 가지의 수행을 육바라밀(六婆羅密)이라고 하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이릅니다.

그 육바라밀의 첫 번째가 바로 보시바라밀입니다. 보시는 남에게 베풀어준다는 말입니다. 재물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재물을 주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법을 베풀고.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위안과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시는 한량없이 베풀면서도 조건을 내세우거나 보답을 바라지 않아야 하며. 베풀었다는 생각마저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라고 하지요.

남에게 보시를 하되 내가 보시를 했다는 생각, 즉 상(相)이 있고 내가 이렇게 보시를 했으니까 나한테 그 보답을 해야 한다는 보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무주상보시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자꾸 보시를 권장하신 뜻은 보시를 통해 궁극에는 마음보시의 참뜻을 터득하라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그 보시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법보시(法布施)입니다.

진리를 이웃에게 전하여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며 보시 중에서도 가장 큰 보시입니다

둘째, 재보시(財布施)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는 보시로써 재물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재보시는 법보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보시여야 합니다.

셋째,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이웃이 겪는 고통을 위로하고 공포를 없애주며 사랑으로 따뜻이 감싸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보시 행(布施行)은 삼독 심(三毒心)의 첫 번째인 탐욕(貪慾)을 무찌르는데 있어 최상의 무기인 까닭에 불자들의 마음 닦는 수행 과정에서 제일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중생들은 자기의 개성(個性)을 ‘나’라고 여기고, 자신의 소유물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탐심은 이기심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푸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이기심을 녹여 내는 데 도움이 되며 또한 이기심과 탐욕이라는 독성을 치유하는 해독제인 것이지요.

탐욕의 때를 벗겨내고 보시를 행하라는 것은 보시로 인색함을 이기라는 뜻입니다. 탐욕과 이기심이 강하면 강 할수록 보시의 미덕을 베풀기는 어렵게 됩니다. 보시 행을 하나의 투쟁과 같다고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지요. 사람은 자신에게 소중하고 쓸모 있는 것을 남에게 베풀기로 마음먹기 이전에 이렇게 먼저 탐욕이라는 마장(魔障)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수행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이미 몸에 붙어 버린 습기(習氣)를 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그만 메추라기는 하찮은 썩은 덩굴에 걸리기만 해도 죽는 수가 있습니다. 비록 힘없는 썩은 덩굴이라도 조그만 새에게는 엄청난 속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힘센 코끼리에게는 쇠사슬도 그다지 큰 힘을 못 쓰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불행한데다 마음마저 나약한 사람은 비록 낡아 빠져 보잘 것 없어진 소유물도 버리지 못하는데 비해, 재벌이라 해도 마음이 굳센 사람은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확신하면 기업마저도 내 놓을 수 있는 것이지요. 탐욕만이 보시의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과법(因果法)이나 사후 세계에 관해 관심조차 없으며 또 아는 것이 없을 때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보시행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이로운 것이지를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위대한 덕행(德行)을 실천할 기회를 잡기 위해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찻길이 지나가는 작은 시골에서 한 농부가 열심히 밭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일하던 농부는 이제 해도 뜨겁고 허기도 져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쉴 생각으로 그늘에 앉아 집에서 만든 도시락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보지 못한 개 한 마리가 달려와 농부를 향해 맹렬히 짖어대었습니다.

배가 고픈가 싶어 음식을 조금 던져주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짖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아해하던 농부가 자세히 보니 개는 기찻길 한쪽과 농부를 번갈아 보며 짖어대었습니다. “기찻길 저쪽에 뭐가 있는 거니?” 호기심이 생긴 농부가 기찻길 쪽으로 다가가자 개는 농부를 안내하듯이 앞장서서 뛰었습니다.

개를 따라간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 소녀가 철로에 발이 끼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고, 멀리서는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서둘러 소녀를 도와 발을 빼주었습니다. 소녀의 발에 상처가 조금 남았지만 다행히 기차가 가까이 오기 전에 피할 수 있었지요.

“너희 집 개가 똑똑해서 정말 다행이구나. 이 개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그러자 소녀가 농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집 개가 아니라 조금 전 처음 본 개에요. 굶주린 것 같아서, 가지고 있던 빵과 물을 조금 나누어 주었더니 계속 따라오고 있었어요. 덕분에 살았네요. 정말 고마운 개에요.”

어떻습니까? 계산하지 않는 사랑이요! 계산하지 않는 헌신, 기억하지 않는 나눔, 보상 없는 희생, 이것이 진짜 선(善)이고 보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와 같이 하찮은 짐승도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보다 엄청난 은혜를 입고도 보은(報恩)할 줄도 모르고 도리어 하늘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며 동포와 법률을 원망합니다.

세상에서 몰라준다고 원망을 하고 탓을 하면 안 됩니다. 진리는 공정한지라 쌓은 공(功)이 무공(無功)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덕이라도 계산하지 않는 사랑, 음덕(陰德)과 무념의 덕이 최상의 덕이 되는 것이지요!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