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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논단] 門과 소통
  • 일간투데이
  • 승인 2018.09.20 17:47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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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심흥식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초빙교수
역사학자 E. H. Carr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현재에 입각해 의미있게 재구성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한양도성과 문에 대한 다양한 인문학적 탐구는 오늘날 당면한 난제를 풀거나 교훈을 얻고자 함이며,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한 철학적 기초를 쌓으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불통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남북 분단, 갑을 논쟁, 보수-진보 갈등, 정규직-비정규직 문제, 양극화 등 사회 각 분야 분열이 있는 곳에서 합의점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대국민 커뮤니케이션도 ‘공보-홍보-소통’으로 이름은 바뀌었으나 정치사회적 갈등의 수위는 더욱 높아만 간다. 한양도성을 둘러싼 역사에서 난세 해법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이 글은 한양도성과 4대문 건립과 조선의 정치철학인 성리학, 소통기구, 소통의 제도화와 실천가 세종, 협치의 진수 정조, 백성의 힘 만민공동회에 주목했다. 이와 함께 명-청 세력교체기 ‘삼전도 굴욕’의 교훈을 되새기려 한다. 지금 미중 파워게임 양상인 한반도 정세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양은 유교 도덕률에 걸맞게 종묘-궁궐-도성의 순으로 건립됐고, 조선의 이념적 설계자인 정도전이 꿈꾼 이념적 지향인 성리학이 지배이데올로기다. 유교 핵심가치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흥인문-돈의문-숭례문 등 동서남북 4대문 명칭으로 깊이 새겼다.

마지막 신(信)을 보강하기 위해 4대문 중앙에 보신각으로 이름을 지어 세웠다. 도성은 안팎을 엄히 구분하고, 나라를 공고히 하며, 권력의 위엄을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문은 여닫는 것이다. 성문을 닫으면 성이 되고, 열면 길이 된다. 고립된 성으로 살 것인가? 세계와 교류-소통하는 열린 길을 갈 것인가? 우리 역사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영어로 문은 ‘Gate’이며, 여기서 유래해 언론-기자를 ‘Gatekeeper’라고 부른다. 문지기이자, 정보의 흐름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언론기능도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여론 형성과 합의 정치에 초점이 맞춰졌다.

■ 합의점 찾기 어려운 ‘불통의 시대’

언론기능을 맡은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두어 간쟁, 탄핵, 시정(施政), 인사(人事), 공론화 기능을 담당했다. 조정의 정보를 하루하루 제공하는 역할은 조보(朝報)가 담당했다. 각급 기관 뿐만아니라 일부 양반계층에게도 전달됐다는 점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공중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의 소통 수단으로는 신문고, 격쟁이 있었다. 신문고는 창덕궁의 이정전, 경희궁의 숭정전 등에 설치됐는데 대궐에 설치돼 백성들의 접근이 어려웠다. 관련연구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에서 언론(698건), 언로(2277건), 민심(1528건), 천심(1천45건). 공론(5천884건)이 언급된 것에 비춰볼 때 조선시대에도 언론과 여론에 대한 관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언로의 개방성 여부이며, 공론 형성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소통의 제도화와 실천에 힘쓴 군주이며, 과학기술의 혁신 등을 통해 조선의 융성기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다. 세종어제 훈민정음은 “ 나랏 말씀이 중국에 달아 …(중략) … 마침내 제 뜻을 시러펴디 몬하노미 하니라. 내 이를 위하야 어엿비너겨 새로… ”으로 창제의 뜻을 밝혔다. “어였비녀겨”는 동양철학의 진수인 인(仁)을 표현한 것이며, 훈민정음은 애민, 자주, 실용 정신의 구현이었다. 오늘날 한류 음악과 드라마가 세계를 뒤흔드는 뿌리에는 우리 말/글인 한글이 있다. 또한 세종은 경연(經筵)을 통한 국정토론과 통합적 의사결정구조, 청정(聽政)을 통해 ‘듣는정치, 의논정치’로 국정을 이끈 점 후대에 귀감이 된다.



정조는 ‘탕평의 소통’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재도약을 꿈꾼 군주다. 정조의 탕평은 노론-소론-남인 각 당파에서 ‘청명한 견해를 고집하고, 준엄한 정치적 원칙을 견지한’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의리를 가리기 위한 공적 토론을 중시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정당성을 중시하는 의견의 정치를 펼쳤다. 이후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황극(皇極: 임금만이 극을 세운다)탕평으로 ‘의견의 정치’에서 ‘진리의 정치’로 선회했다. 대한민국 지도자의 리더십과 관련해서도 곱씹어볼 대목이 많다.

■한양도성 4대문 의미 되새길때

조선 말기 세도정치는 안동김씨 등 소수세력의 비변사 과점과 국정농단으로 이어졌고, 특정가문이 권력을 사점하고 사회적 부를 독점하는 폐해를 낳았다. 민중의 저항은 거세졌고, 홍경래의 난, 갑오농민전쟁 등이 그렇다. 19세기말 외세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무기력해진 조정과 이에 대항해 나라를 지키자는 운동은 구한말 만민공동회로 이어졌다. 나라가 어려울 때 지키려고 나선 이들은 기득권이나 지배세력 보다는 백성-민초들이었다. 만민공동회의 정신은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 정신이 되었다. 불굴의 저항정신은 4·19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10항쟁, 2017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 권력의 부패나 독재정권을 시민의 힘으로 바로 잡아온 자랑스러운 역사다.

‘한양도성의 정치지리학적 접근: 문과 소통’은 세종의 ‘어엿비녀겨’에 뿌리내린 위민(爲民), 인(仁)의 철학, 정조의 탕평을 통한 협치(協治), 역사를 바로세우는 주체인 민중이라는 3가지를 중심축으로 살폈다. 자랑스러운 도성의 역사를 돌이켜 보고 미래를 밝혀나갈 방법론을 찾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심흥식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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