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길 속에 길이 있다 <17>

요즘 ‘주식회사 대한민국’ 이라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이제 국가도 하나의 기업처럼 경쟁력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이니, 국가브랜드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도로에는 바로 이런국가 브랜드가 존재한다. 일찍이 명품도로를 만든나라가 로마였다면, 이젠 우리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도로를 갖고있다. 우리 도로기술의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세계 많은 나라들이 우리의 도로기술과 관리, 운영방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

다른 나라의 도로에 관한 정보를 나누고 기술을 공유하다 보면 그 나라의 도로 담당자들과 만날 기회가 종종 있다. 1995년부터 1996년에 필자가 도로건설과장과 도로정책과장으로 재직할 때 미국, 일본, 중국과 각각 도로협력회의를 갖기로 협약하였다. 협력회의의 주체는 양국의 도로국, 매해 번갈아가며 상대국을 방문해 도로기술, 정책, 재원 등과 같은 의제를 놓고 세미나를 갖고 자료도 교환하고 현장시찰도 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2005년 현재 중국과는 열 차례, 일본 . 미국과는 각각 아홉 차례의 회의를 가졌다.

그런가 하면 필자가 도로국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에는 인도네시아와 도로에 관한 교류회의를 정기적으로 갖기로 약속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져 인도네시아와의 교류회의도 자카르타에서 열리게 됐으니 참으로 보람을 느낀다.

회의가 열릴 때마다 중앙정부 공무원, 지자체 공무원, 학계 등에서 10여명의 대표단이 구성된다. 올해는 일본과 중국에서 대표단이 오고 미국에는 우리 대표단이 간다.

그동안 다른 나라의 도로 관계자들을 만나다 보니 잊지 못할 추억담과 인간적인 정도 많이 쌓였다. 비록 서로 다른 나라의 도로발전을 위해 일하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이지만 같은 분야에서 일한다는 동료의식은 서로를 끈끈하게 만들어주곤 했다.

2002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7회 한일도로협력회의에서의 일이다. 당시 일본의 대표단장인 국토교통성의 도로국장은 새로 부임한 사또 노부아끼 국장이었다. 1947년생으로 교토대학 토목공학과 출신인 그는 2002년 7월부터 2년 동안 도로국장을 역임하였다. 그후 2004년엔 우리나라의 차관보급인 기감으로 승진했다가 2005년 7월엔 사무차관으로 또다시 승진한 도로분야의 전문행정가였다.

사또 국장은 매우 이지적이고 관료적인 도로전문가로 정평이 나있었다. 1972년 건설성에 입사한 이후 계속 도로분야에 근무하며 나름대로의 식견을 가진 그와 도로정책에 관하여 비교적 상세히 토론할 기회가 있었던 건 내게도 행운이었다. 그는 한국의 친환경정책, 안전정책, ITS계획, 도로재원제도 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제7회 회의가 끝난 후 그는 일본 도로국 과장들에게 “한국의 도로정책 가운데 벤치마킹할 것들이 많으니 앞으로 연구해서 리포트를 내라"라고 했다한다. 훗날 이 소식을 들으니 보람과 함께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사또 국장과는 2003년, 2004년에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술자리까지 함께하며 분위기를 맞추는 데 애를 썼던 그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지금도 떠오른다.

하지만 업무에는 매우논리적이고, 대인관계에서는 사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가 있는, 참으로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또 기억나는 한 사람은, 중국의 공로사 사장인 장지안페이라는 분이다. 중국교통부에는 공로사 라는 조직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도로국에 해당되며 국장을 사장이라고 부른다. 장지안페이사장을 처음 만난건 2004년 7월, 필자가 베이징에 갔을 때였다.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영어에도 능통했다. 1958년생이니 젊은 나이에 이른바 출세한 인물인데, 성격이 매우 호탕했다. 또 연회에서는 좌중을 사로잡는 마력 같은 게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과적차량 단속문제가 국가적 현안으로 대두하고 있었던 터라 필자가 과속차량 단속을 위한 우리의 제도를 설명했더니 크게 관심을 갖고 중국에도 이를 도입하겠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했다.

2005년 7월, 한국을 방문해서는 필자의 사무실에도 들렀는데 몹시 반가워하면서 덥석 껴안기까지 했다. 그만큼 유쾌하고 호방한 인물로 기억에 남는다. 중국과의 협력회의는 어느 나라와의 회의보다도 정겹고 인간적이었다. 식사를 같이하는 자리에서는 계속 서로 술을 권하면서 담소를 나누고 때로는 ‘러브샷’ 도하며 우의를 다졌다.

솔직히 필자는 술이 매우 약하다. 더욱이 도수가 높은 중국 술에는 맥을 못 추는 편이다. 한번은 중국 대표가 술을 권하기에 “몸아 안 좋아서 마시기 곤란하다” 고 했더니 중국 속담 한 가지를 들려주었다.‘샹센티뿌샹깐칭’. 풀이하면 신체는 상하더라도 감정(마음)은 상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말까지 들으니 도저히 안 마실 수가 없었다. 기왕 마시는 술, 운치있게 마시자 싶어 때로는 영어로, 때로는 메모지에 필담으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논하고, 삼국지에서 여포와 관운장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죽마고우라도 된 듯했다.

서로 박장대소하고, 맞장구도 쳐가면서 그렇게 베이징의 밤은 시나브로 깊어만 갔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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