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또 다른 길- 물길과 철길<11>

철도가 개설되기 전, 우리나라는 주로 수운과 조운을 이용해서 물자를 수송했다. 그리고 지게나 인력거, 우마차가 물건을 날랐다. 구한말, 우리나라에서3년을 머물렀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자신의 수기에서 우리나라의 교통수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조선의 교통수단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길은 좁고 험하고 교량은 드물다. 교통의 주요 수단은 소와 작은 말이다. 수레는 구조가 빈약하고 선박은 지극히 원시적이며, 편마와 편마선은 상당히 초라하다. 조선에도 철도를 합리적으로 건설하게 되면 복지국가로 발전하는 데 밝은 전망도 있다. 도로와 교량을 일정한 계획 아래 구축하고 주선과 지선을 가진 합리적인 철도망을 건설한다면 조선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복지국가로 발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가 하면 1885년 4월, 지금의 외교사절 격인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됐던 김기수는 견문기<일동기유>에서 일본에서 기차를 탄 소감을 피력하고 있다.

“요코하마에서 신바까지는 화륜거(기차)를 탔는데 역루에서 조금 쉬었다. 일행의 행장은 배로 에도의 항구까지 바로 보내고 필요한 의복과 물건만을 차에 싣기로 하였다. 차가 벌써 역루 앞에 도착했다고 하기에 역루 밖에서 또 복도를 따라 수십 칸을 지나가니 복도는 다 되었는데 차가 보이지 않았다. 장행랑 하나가 40~50칸이나 되는 것이 길가에 있어 나는 차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이것이 차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차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차의 화륜이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모두 구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같이 날뛰었다. 한 시간에 300~400리를 달린다고 하였는데 차체는 안온하여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며 다만 좌우로 산천초목, 가옥 인물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 번쩍 뒤에 번쩍 하므로 도저히 잡아보기가 어려웠다.”

이런 일들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도 철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무렵은 세계 열강들의 각축전이 치열한 때였다. 188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러시아· 일본 등 열강들은 조선을 둘러싼 이권쟁탈에 혈안이었다.

굵직굵직한 개화사업을 독식하기 위해서였다. <독립신문>은 이 무렵의 분위기를 국민들에게 이렇게 알리고 있다. “금광과 철도, 삼림 채벌권이 계속 외국인 손에 넘어가고 있으며 이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이권인 철도부설 중에 나라의 혈맥인 경인선은 미국에, 경부선과 경의선은 일본에, 경원선은 프랑스에 넘어갔고·······.” 이렇듯 우리나라의 철도는 우리 손이 아닌 이방인들의 손으로 건설됐다.

철도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1882년, 열강들로부터 철도부설권 요구가 일어나면서부터였다. 당시 재정고문이던 독인 인 묄렌도르프는 국고가 부족하니 철도의 부설은 연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건의했다.

1885년 이 문제는 다시 거론되었으나 길게 논의되지 못했다. 조선의 철도개설에 가장 큰 야심을 드러낸 것은 일본이었다. 이는 일본이 출간한 <조선철도사> 에도 잘 나타나 있다. 겉으로는 우리나라의 입장을 옹호하고 세계 열강의 침투를 견제하는 척하지만 실은 이권쟁탈에 혈안이 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철도부설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이룩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적고 있으나 철도가 우리나라와 만주 등 동양 침략을 위한 교량 역할을 한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이 이렇게 철도부설권을 탐냈지만 열강들의 철도부설권 쟁탈전에서 승리한 것은 미국인 제임스 모스였다. 1896년 3월의 일이었다. 일본은 아연실색하여 경인철도 부설권의 매수만 노리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경인철도합자회사를 설립하였는데 본사는 도쿄에 두고 실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인천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다. 이런 일본에게 기회가 왔다.

1897년 3월29일, 인천 우각현에서 경인선 철도의 공사가 시작됐지만 결국 자금부족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학수고대하고 있던 일본은 당장 부설권을 인수하여 1899년 4월부터 다시 공사를 시작했고, 그해 9월 18일 제물포부터 노량진 사이의 33.2Km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렇게 철도는 자동차보다 한 발 앞서 대중교통의 장을 열었다. 경인철도가 개통되자 처음으로 화륜차가 다닌다고 각처에서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정거장이며 선로에 몰리는 바람에 열차 운행에 큰 지장을 주었다. 게다가 일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철도의 운행을 방해했다.

여름철에는 철길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돌이나 장애물을 철길에 놓고 포인트를 돌려놓기도 하고, 열차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 철도회사에서는 이를 막고자 고심했지만 별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순사를 고용해서 조사를 하는 바람에 이런 사람들이 순사만 보면 줄행랑을 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기차에 양복을 입은 잘생긴 남자가 타면 기생들이 따라 타는 일도 있었다. 또 엽전을 사용하던 때라 한 닢 두 닢 돈을 세다가 기차가 떠나면 손을 들고 쫒아가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제물포에서 노량진 사이만 오갔던 경인선 철도는 1900년7월, 한강철교가 준공되면서 노량진부터 서울역(당시의 서울역은 서대문으로 현재의 이화여고 자리)이 개통되어 서울과 인천이 완전히 연결되었다.

그런데 한강철교는 기차만 다닐 수 있는 다리였다. 이에 1916년, 일본은 경부선 철교 옆에 인도교를 기공해 1917년 9월 개통시켰다. 이 공사는 공사 규모나 건설비, 인력, 신기술 투입이 가장 컸던 대역사였다. 첨단공법으로 지어진 이다리의 완공으로 서울 중심부와 한강 이남의 노량진은 물론 인천과 수원 간의 자동차 소통이 비로소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이같은 한강 인도철교는 서울의 명물로 등장했다.

주말이면 구경하러 나오는 사람들로 한강 백사장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선 ‘한강 쌍철다리’ 구경이 유행이었다. 쌍철다리는 먼저 개통된 기차철교와 그 옆에 나란히 개통된 인도철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경인선의 복선화는 8·15광복 후인 1960년대에 이루어졌으며, 1974년 수도권 전철화계획으로 전철화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였던 경인선은 오늘날까지도 경기 서부지역의 공업발전과 운송체계에서 중추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글 : 남인희 前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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