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시민들이 1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일간투데이 정우교 기자]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달째인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또 하나의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아우내 장터에는 3천여명 군중이 모였다. 만세운동에 참가한 군중에 대해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했고 그 결과 사망자는 19명, 부상자는 30명이 발생했다. 많은 사람들이 검거됐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도 이때 체포됐고 공주 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게 된다. 그렇게 100년이 지나 우리 정부는 지난달 26일 유관순 열사에게 국가유공자 서훈 1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를 의결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서울 종로에서 시작된 독립의 물결은 경기, 강원은 물론 멀리 황해도, 평안도, 간도까지 전개됐다. 지금부터 100년전 3월 2일부터 4월 1일까지 만세운동의 주요 기록을 시간순으로 살펴보자. 

■ 3월 2일~3월 10일 

1919년 3월 5일 서울역.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과 보성법률상업학교 강기덕의 주도로 3·1운동 후속시위가 벌어졌다. 김원벽과 강기덕은 3·1운동에도 민족대표 48인으로 참여한 바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각각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군중을 이끌었다고 한다. 

3월 8일 대구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의 계획을 접한 독립운동가 김태련, 김영서는 8일 서문외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모인 군중의 숫자는 1천여명이었다. 

3월 10일 광주와 철원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독립운동가 최병훈이 주도한 철원 만세운동은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이었다. 10일, 11일, 18일에도 일어났고 4월 8일에도 전개됐다. 광주의 만세운동은 애초에 8일 계획됐지만 연기돼 일어난 독립운동이었다. 이날 모인 군중은 학생, 농민 등 약 1천여명이었다. 

■ 3월 11일~3월 20일

3월 11일 안성에서도 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안성읍을 시작으로 죽산, 양성, 원곡면 일대에서 전개됐고 30일에는 독립운동가 윤순철, 고성준, 한국초의 주도로 읍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안동에서는 3월 17일 독립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났고 기독교인·천도교인 등 3천여명의 군중은 18일에도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22일 2차 만세운동이 발생했는데 이때 일본군과 투석전을 벌여 13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안동의 독립만세운동은 이후 3월말까지 지속해서 일어났다.

■ 3월 21일~4월 1일

3월28일 음성군 내에서 서당생도들이 만세운동을 벌인 것에 이어 4월 6일 500여명의 군중이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날 황해도 안악읍에서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는 만세운동이 벌어진다. 이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인물은 독립운동가 조인원. 독립운동가 조병옥의 아버지였다. 

■ 국민 42.9% "3·1운동 정신의 핵심은 '자주와 독립'"

3·1 독립선언서는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조선이 독립된 나라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문장이다. 3·1운동 이후 전국 곳곳에서는 수많은 국민들이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펼쳤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후손들은 선조들의 정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26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우리 국민들은 '3·1운동 정신의 핵심'을 묻는 질문에 '자주/독립'(42.9%)이라고 답했다. '애국/애족'(24.3%), '국민주권과 참여'(18.5%) 등의 의견도 있었다. 후손들은 100년전 독립선언서에 쓰인 문장과 선조들의 정신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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