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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시론] '말법시대' 민초의 꿈장정태 삼국유사연구원장
  • 일간투데이
  • 승인 2019.04.18 16:42
  •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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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사회에선 거주하는 사람에 따라 건물 이름이 정해졌다. 건물은 위로부터 전(殿)-당(堂)-합(閤)-각(閣)-제(齊)-헌(軒)-루(樓)-정(亭)의 8품계로 나뉘었다. 전은 왕과 왕비의 거처 및 집무실이나 부처님이나 공자를 모시는 곳으로 근정전, 강령전, 교태전, 대웅전, 대성전이다. 당은 왕의 자녀 큰스님, 유생들의 공부방으로 자선당과 명륜당이 있다.

합은 왕족 중 서열이 높은 사람 또는 전, 당의 부속건물을 말하며 각은 왕실 가족, 정승, 판서 집무실을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까지 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제는 고급관리, 헌은 공무용 건물, 루는 휴식용 2층 건물, 정은 휴식용 1층 건물에 붙인 이름이다. 왕을 전하라고 한 이유는 왕을 뵐 때 왕의 거처인 전의 아래에서 뵙기를 청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민간신앙의 전각인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 등 각은 4번째 해당된다. 결국 불교가 민간신앙을 포용하면서 그 격을 상당히 낮게 평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대다수 전각들은 대웅전이라고 하는 불교의 주불인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곳을 지나가도록 하는 방법을 통해 불교와 친숙하게 하는 포교방법을 동원했다.

■ 대웅은 단군 관련 없는 인도 사상

민간신앙을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을 신과 가까이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웅전 뒤편에 건축한 것에 대해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았다. 부처님보다 더 높게 받들고 있다는 고마움으로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은 속 깊은 배려심은 한국불교가 민족종교화될 수 있었다고 본다.

한국불교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대웅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불이 사마에게 항복을 받아낸 위대한 영웅에서 유래된 것으로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마란 곧 악마이며 악귀, 악신의 총칭이다. 대웅전은 위대한 사람, 영웅을 모신 웅장한 건물이며 사찰 경내에서 제일 중심에 위치하며 내부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를 좌우에 협시불을 세운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세우는 것이 기본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대웅전에는 삼세불과 삼신불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삼세불은 현세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과거불인 연등불 또는 가라보살 그리고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좌우에 협시한다. 각 협시불 좌우에 석가의 10대 제장 중 가섭과 아난존자를 세우기도 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원래 대웅전을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전각으로 썼다. 불교가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삼신으로 모셨던 환인, 환웅, 단군이 내 몰리면서 그곳에 불교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은 삼성각이라고 부르는 전각을 예로 들고 있다. 여기서 삼성은 환인·환웅·단군을 말한다. 이들의 주장과 별도로 일부 재야사학, 상고사 연구자들은 환인을 국가로 주장되기도 한다. 환국이 있고 그곳에서 환웅이 내려와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주장이다. 고조선 건국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강동 일원으로 보기도 한다.

■ 고조선 건국지는 평양 강동 일원

대웅은 굳이 불교의 용어라고 하기 이전 인도에서 부처님과 비슷한 시대에 활동한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Mahavira)의 이름의 뜻은 '위대한 영웅'으로 한역(漢譯)은 대웅(大雄)이다. 자이나교는 인도의 크샤트리아에서 교주가 일어난 것과 브라만교를 반대하여 창도한 것이나 해탈을 이상으로 하여 전파하는 것이 불교와 흡사하다.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대웅전이 우리 고유 신앙에서 유래됐다면 중국·대만·베트남·한국은 동일 문화권으로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민족이 돼야 한다. 이들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 우리는 석존의 고향과 성도지를 제주도라는 주장도 하게 된다. 설산과 녹야원은 눈 내린 제주도에 노루가 방목되는 장면과 500나한상이 이들이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가 되고 있다.

17세기경에 산신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을까. 조선시대 말 지방의 거의 모든 사찰들은 더 이상 소작료만으로 운영을 할 수 없게 됐고, 시주를 받거나 지역 주민들을 위한 의식이나 기도회를 주관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일반 신도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출 수 있는 의식들을 제공하게 됐다. 불교적인 의식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산신이나 칠성, 용왕 등 신중탱화 속의 신들을 다시 개별화시키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주장으로 종교혼합기라 할 고려시대에 일어난 현상이 오늘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혼돈의 말법(末法) 시대에 민초들을 구제할 꿈은 언제쯤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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