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서경대 나노융합공학과 학과장>

▲ 김종훈 박사(서경대학교 나노융합공학과 학과장)

"힘이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의 죄책감을 높여 컨트롤하려 합니다. 최소한 제 강의실 안에서 죄책감은 없습니다. 죄책감을 높여서 다른 사람을 컨트롤하는 것은 교육(Education)이 아니라 길들이기 (Taming)이기 때문입니다.”

공돌이들 첫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꼭 해주는 두 가지 이야기 중 첫 번째 이야기다.

두 번째는 너무 무겁긴 하지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정말 죽고 싶어 지면 연락하세요. 언제 연락해야 하는지 그 때가 되면 스스로 아실 겁니다.

리포트를 기한 후에 늦게 제출하셔도 저는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 않습니다.

제출이 늦은 학생이 저에게 어떤 해를 끼친 것도 아닐뿐더러 늦은 제출로 인해 좀 낮아진 평가점수는 여러분의 성적을 여러분이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2000년대 중반에는 강의 시작 5분이 지나면 문을 걸어 잠그는 교수도 있었다. 강의실이 안으로 잠겨 있으면 학생은 돌아갈까? 아니다.

수업에 늦은 학생은 그냥 돌아가면 더 큰 불이익이 있을까봐 강의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서있기 마련이고, 강의시간 내내 밖에서 늦은 잘못에 대한 죄책감을 키우며 결국 그 죄책감에 압도되어 지배당한다. 

"아, 내가 엄청 잘못했구나. 불이익을 받아도 당연하지…"

불이익을 줄 힘이 있는 사람들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불이익과 죄책감의 연쇄반응을 이용한다.

죄책감은 벌 받듯 주어지는 불이익으로 증폭되고, 불이익은 죄책감 하나를 매듭짓는 수단으로 이용되며 죄책감으로 길들여진 사람은 가끔 주어지는 당근에 감사하게 된다.

이렇게 죄책감을 기반으로 길들여지면 엄청난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스스로 먼저 위축되고 지배당한다.

아무도 아닌 자연인이 대통령의 취임연설을 마음대로 한줄한줄 고치는데 누구 한 사람 뭐라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된 이유도 여기 있다. 공무원도 결정권자도 아닌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국민인 그가 바로 어마어마한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죄책감의 또 다른 이름은 ‘자기검열’이다. 대학생이 스펙을 쌓아야 취업이나 진학에 유리하다는 이야기 뒷면에는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스펙은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자기검열이 포함되어 있다.

대기업에 취업하고 싶은 학생은 소셜 미디어 상의 댓글 하나 다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대기업 취업 담당자가 혹시 내 이름이나 이메일로 검색해 보지 않을까’ ‘취업하고자 하는 공공기관의 정책 방향에 비판적인 댓글을 올렸었는데, 지워야 하지 않을까’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창업을 하고 싶은 교수가 가장 먼저 하는 걱정은 ‘창업’이 아니라 ‘겸직 규정에 위배되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이고, 혁신적인 개선 방안을 제시하는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가장 먼저 걱정해야 하는 것은 ‘혁신’이 아니라 ‘이런 의견 개진으로 상사에게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이다. 그 불이익이 언제나 법 적용보다 앞서니까.

지금 눈 앞에서 아이들이 1분에 10명씩 그 소중한 목숨을 잃어가는 상황에서도 윗분의 방문을 준비하는데 급급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보아서 알고 있다.

영접받는 윗분 기분이 나쁘면 직접 불이익을 받을 것이니 당장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보다 더 큰 죄책감을 가져야하는 일이라고 자기검열을 하도록 교육되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불이익을 주는데 서슴지 않는 무시무시한 정권과 재벌에 언론이 자기검열을 해야 했던 이유도 죄책감으로 교육된 세대의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기사 하나에 광고가 우수수 끊기면 안 되니까. 기사 하나에 사장님 호출을 받고 좌천되면 안 되니까.

실은 가까운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 사회 풍토도 죄책감 기반 교육에 일부 뿌리를 두고 있다. 자신이 받을 사회적 불이익과 미안함으로 표현되는 죄책감을 갖게 되는 부담이,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때 짊어져야 하는 양심의 가책보다 더 비중이 크다고 교육이란 이름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남의 일 상관 말라'는 해묵은 클리셰의 그 ‘일’이 아름다운 일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처벌을 피할 일말의 힘이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 ‘죄책감’을 덜면 그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방법은 ‘모른다’ ‘몰랐다’ ‘잘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내가?’ ‘누구?’ 라고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회에서 더 이상의 불이익은 없다.

꼭 기억해야할 것은 힘 없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소용없다. 폭풍 같은 불이익을 받게 되니까. 그나마 최근 들어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모른다고 일관하다 이로 인해 오히려 구속되는 사례가 생기는 것을 보면 다행히도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솔직한 것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

죄책감에 대한 페널티로 교육되면 죄책감 최소의 법칙이 판단의 주요 근거가 되는 경우가 많다. 가정이나 학교, 회사나 공공기관 어디든 교육이 필요한 격려와 인센티브로 교육되면 버르장머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중되는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을 마주할 여유를 갖게 된다.

이쯤 되면 그래? 그럼 적절한 죄책감과 불이익, 당근의 배합 말고 어떤 교육을 펼치라는 말이냐. 고 물으실 분도 있을 것이다.

학부 4학년 때였다. 추천서를 받으러 학부 지도교수님이신 이덕열 교수님을 찾아 뵈었다.

“어, 어쩌지? 지금 교수 휴게실에서 학과 교수회의 해야 하는데” “아, 그럼 언제 다시 오면 될까요?”“아니야. 내가 전화해서 20분만 기다리시라 하고 자네 추천서를 써주겠네”

문탁진 교수님, 김병호 교수님, 변재동 교수님, 최인훈 교수님, 임대순 교수님, 서광석 교수님 기라성 같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교수님들이 기다리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현기증이 났다.

추천서를 쓰시는 동안 안절부절 못하는 내게 남기신 말씀 “이봐, 자넨 payer(지불하는 사람)고, 난 service giver(서비스 제공자)야. 당당해야 해” 단 한 번의 일깨움으로 한 학생의 평생을 좌우하는 교육이 끝났다.

그래서 내 강의 시간이든, 뭔가 묻거나 부탁하러 찾아온 학생이 위축되어 있으면 똑같이 이야기해 준다. 

“있잖아, 나는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service giver고 너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payer야. 내 앞에서 당당해야 해. 뭘 원하니?”

국회의원님들도 공무원 여러분도 똑같이 이야기해 준다면 모든 국민들이 단 한 번에 제대로 깨우칠 텐데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지도자 분들도 이렇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솔직함을 보인다면 현 시점의 많은 갈등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의 돈으로 투자 받아 경영하는 대기업 경영자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가를 지불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이 당당해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서비스 제공자들이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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