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배상 판결 보복 조치 본격화
국내 기업, "대응책 모색 부심"…"재고↓" 등 전화위복론도 나와

▲ 일본 정부가 1일 한국으로의 수출관리 규정을 개정해 스마트폰 및 TV에 사용되는 반도체·디스플레이 등의 제조 과정에 필요한 3개 핵심 소재 품목의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경기도 화성 삼성 반도체 생산라인. 사진=삼성전자

[일간투데이 이욱신 기자]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 제조 등에 필요한 핵심 소재 등의 수출을 제한하는 규제 조치를 발표했다. 지난해 11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첫 배상 판결이 나온 지 8개월여 만에 본격적인 보복조치에 나선 것이다.

국내에서는 정부가 관련 산업계와 협의하며 사태의 장기화에 따른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일이 최근 재고 물량 과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또한 미국의 대표 IT 업체 애플이 반도체·디스플레이의 대부분을 삼성·LG·SK 등 국내 업체에서 공급받는 등 세계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에서 우리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있기 때문에 다른 국가에도 직·간접적인 피해가 발생하면서 일본 정부 예상대로 한·일 양국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국제 여론의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1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날 수출관리 규정을 개정해 오는 4일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 등의 제조 과정에 필요한 3개 핵심 소재 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교도통신은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번 조치의 배경 원인을 '(양국 간) 신뢰관계가 현저히 훼손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며 "이는 징용 배상 판결 문제를 놓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 해결방안을 제시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사태가 진전되지 않자 강경 조치를 단행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 수출을 규제하는 세 품목은 ▲TV와 스마트폰용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등에 사용되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반도체 원판 위에 회로를 인쇄할 때 쓰이는 감광재인 리지스트 ▲반도체 세정에 사용되는 에칭가스(고순도불화수소)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이들 품목의 한국 수출 절차를 간소화하는 우대 조치를 취해왔으나 한국을 우대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수출규제를 가할 방침이다. 우대 대상에서 제외되면 수출 계약별로 90일 가량 걸리는 일본 정부 당국의 승인절차를 거쳐야 한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리지스트는 세계 전체 생산량의 90%, 에칭가스는 약 70%를 일본이 점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 이들 소재를 공급받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삼성디스플레이 등 관련 한국 기업들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개별 기업에서 통제할 수 없는 정치·외교적 이슈로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하기 어렵다"며 "시장 상황을 지켜보면서 대응책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또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단은 수출시 일본 정부 허가를 받도록 하는 것이므로 완전 수출금지라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중첩돼야 가능할 것"이라며 "다만 생산차질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내부적으로 재고 물량을 최대한 확보하고 대안 소재를 찾는 등의 대응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 디스플레이 업체 관계자는 "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에 사용되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경우 원료를 규제하겠다는 건지, 완제품을 규제하겠다는 건지 명확하지 않다"며 "좀더 정확한 정보를 파악한 뒤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가 전면적인 수출 제한 조치를 실행에 옮길 가능성은 크지 않으며 이럴 경우 역으로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에 호재가 될 수 있다는 전화위복론을 내놨다.

김양재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날 투자 보고서를 통해 "현재 반도체·디스플레이는 공급 과잉 국면에 놓여 있기 때문에 국내 제조사들은 이번 이슈를 계기로 과잉 재고를 소진하는 한편 규제로 말미암아 발생한 생산 차질을 빌미로 향후 일본 업체에 대한 가격 협상력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사들이 향후 국내산 소재의 비중을 늘릴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국내 소재 업체들도 반사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며 "반면 일본의 소재 업체는 직접적인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예상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생산설비(CAPA) 점유율이 53%에 이르는 세계 최대 소재 시장인데 반해 현재 도시바나 샤프 등 일본 업체들은 점유율을 늘릴 여력이 없는 상황이어서 결국 이번 규제 시도는 일본의 자충수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국제 여론의 추이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기술 전문 매체인 패이턴틀리 애플(Patently Apple)은 일본의 조치가 장기화된다면 미국 최대 IT기업이자 글로벌 스마트폰 제조사인 애플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애플의 주요 디스플레이 공급사인 삼성과 LG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같은 첨단재료의 재고를 비축해 놓았을 가능성이 높아 애플이 단기간에 어려움에 처하지는 않겠지만 이 문제가 장기화된되면 애플도 타격을 입고 궁극적으로 미국 소비자 등에도 그 파급효과가 미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또한 외교 문제를 경제 문제로 엮은 이 같은 대응은 일본 정부가 지난달 28~29일 오사카(大阪)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면서 주창했던 '자유롭고 공정하며 무차별적인 무역원칙'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일본 정부가 국제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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