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대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인생은 학업, 결혼, 내 집 마련, 교육, 재무, 은퇴, 노후 설계 등 일련의 여러 개의 다양한 설계 속에 놓여있다. 정년이후의 계획을 막연하지만 나름 설계해 두었는데, 하나 빠진 것이 있었다. 마지막 설계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빈부·권력·지위를 불문하고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은 죽음의 이러한 속성을 알고 있지만, 죽지 않을 것 같이 산다. 심지어 죽음을 외면하거나 부정하기까지 한다. 죽음이 결코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시한부선고라도 받게 되면 죽음의 공포가 몰려오고, 더 살 생각만 하느라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며, 우왕좌왕하다 속절없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음을 죽을 때가서 생각해도 된다고 하면 이미 늦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지금의 삶에 더 열중하자는 것이다. 삶도 죽음도 철저히 계획되고 준비돼야 한다. 연습이 없기 때문이다.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마지막 설계다.

■인격·삶에 대한 전면적 설계로

마지막 설계는 죽음에 대한 설계 같지만, 도리어 삶의 설계다. 자녀의 삶을 위한 설계 같지만 실은 나의 삶에 대한 설계다. 또 마지막 설계는 재산상속이나 절세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상속설계와 다르다. 우리의 마지막이 절세에 그친다면 삶이 너무 공허하다.

마지막 설계는 재산, 부모의 명예나 정신, 가치의 계승을 포함하는 종합적 설계요, 인격과 삶에 대한 전면적 설계다. 마지막 설계를 미룬다고 생명이 연장되는 것도 아니고, 앞당긴다고 삶이 단축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 설계는 삶에 마침표를 찍자는 것이 아니라 쉼표로 연결하자는 것이다.

중세의 수도승들은 만나면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였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란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보통 겸손하게 살라는 말로 이해되지만, 핵심이 빠져있다. 메멘토 모리란 죽음으로부터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고, 인간의 행위를 통해 기쁨을 얻으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인간은 물론 인간이 이룬 모든 것이 쇠멸되기 때문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현재를 잡으라' '지금을 즐기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 역시 충분하지 않다. 카르페 디엠이란 일상의 날들을 주신 이를 생각하며 소중하게 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죽음 없는 '메멘토 모리' 없고, '카르페 디엠' 역시 없다.

내년 2월이면 정년이다. 정년을 앞두고 손 때 묻은 수많은 책들을 천천히 정리하면서, 다시 느낀 것이 마지막 설계다. 연구실을 비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인생을 비우는 작업이 준비 없이 간단하게 해치워지듯 행해질 수는 없다. 30년 넘게 정든 캠퍼스를 떠나야 하고, 연구실도 비우고, 동료들과도 헤어져야 한다.

헤어짐에 익숙할 나이가 됐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몇 년 전부터 은퇴 후의 삶에 관해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내 삶의 전부였던 헌법을 내려놓기로 했다. 헌법은 좁게는 나와 내 가족의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넓게는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젠, 그 '헌법'을 '헌 법(낡은 법)'이 되게 하려 한다.

지금까지의 헌법학자는 버리고 진화론의 허구를 알리는 전도자의 일을 하려고 한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헤어짐은 자신과 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필자 역시,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시작하려하니 불안과 염려를 지울 수 없다. 더욱이 제2의 삶이란 게 진화론으로 덮여있는 세상을 향해 진화의 허구를 알리려 한다니, 무모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일일 수 있다.

■'죽음' 이후까지 생각해야 완성돼

하지만 새로운 나를 만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또 골리앗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 새로운 힘이 솟구친다. 사람은 변화를 원하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해 정작 변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런 마음을 주신 분에게 감사할 뿐이다. 익숙한 헌법과 헤어지지만 전도자로서의 일은 인생 2모작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으로 믿는다. 제2의 삶은, 전문성이 결여돼 생뚱맞다고 하겠지만 두고 볼 일이다.

나무는 두 번 산다고 한다. 처음은 나무자체의 삶으로, 그 다음은 목재로 쓰인 후의 삶이다. 나무만 두 번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두 번 사는 것 같다. 은퇴 전과 후의 삶이다. 두 번째 삶은 사람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지겠지만, 필자는 예수를 땅 끝까지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 나무가 좋은 목재로 오래 남으려면 수 십 년 건조시켜 내부 수분이 완전히 빠져야 한다고 한다. 필자도 적지 않은 광야 훈련을 통해 내부의 불순물이 상당히 제거됐다.

마지막 설계는 죽음에 대한 설계라고 했는데, '진정한' 마지막 설계는 죽음을 넘는 설계여야 한다.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마지막 설계가 필요하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죽음으로 인생이 끝난다고 본다면 마지막 설계가 마지막이 되겠지만, 죽음이후까지 설계가 돼야 마지막 설계는 완성된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있으니 필자에게 필요한 것은 마지막 설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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