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박사(서경대학교 나노융합공학과 학과장)

[일간투데이] 우리는 지금 하늘같이 무서운 공권력 행사를 보며 또 다른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 일제의 압제와 해방 후 미군정의 지배 그리고 군사독재시절의 중앙정보부의 서슬퍼런 통제의 역사를 겪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현재의 검찰제도가 일제강점기에 무자비한 식민지 통치수단으로 도입되고 형성된 이후 지난 20년의 검찰공화국 식민지화에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임상의학개론 시간이었다. 다음 해에 병원장이 되신 신장내과 김형규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제 케이스를 제시해 주시고, 질환을 분석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다.

해부학에 대한 지식도 일천한 바이오 쪽 전공 학생들을 명륜동 국립과학관 인체의 신비전에 데려가서 오후 시간 내내 설명해 주시고 맛난 저녁도 사주실 정도로 살가운 스승님 이셨다.

“여기 이렇게 신장 뒤쪽 척추에 가까운 종양을 제거하면 사람은 살겠지만 신경이 손상될 위험이 너무 높아서 하반신을 못쓰게 될 수도 있어. 여러분이 외과의사라면 칼을 들까?”

머릿속에서는 ‘일단 다른 치료법도 고려해야 하고, 감마 나이프 같은 수단이나 새로운 외과적 접근도…’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런데 충분히 환자 측에서 이해하고 난 후 수술을 해서 성공적으로 종양을 제거했는데 환자분이 움직이는데 장애가 생겨서 의료사고라고 고발한 서류가 오늘 내게 넘어왔어요.”

“의료사고라고 인정된다면 대학병원 측에서 부담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건 병원에서 감당해 줘야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예요. 이런 일을 겪은 의사가 다시 복잡하고 어려운 수술 집도를 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걱정해야 하는 것은 현재 환자의 상태를 개선할 방법이지만 후배 의사들을 챙겨야 하는 내 입장에서 또 다른 한 편으로 걱정되는 것은 이런 부분 이예요.

참 집도하기 어려운 수술,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잃을 수 있는 수술을 누가 하겠다고 나서겠어요? 정말 큰 결심을 해서 생명을 살렸는데, 의료사고라고 소송이 들어오는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의료사고를 미화하기 위해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암세포도 잘라 내기 좋은 자리에 예쁘게 자랄 생각은 없다. 국민을 위해 각종 상황에 대해 용감하게 집도를 할 수 있는 의사가 늘어나려면 그들이 치료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부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경심의 표현이 있어야 우리도 더 나은 의료환경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현실을 좀 더 간략히 표현하자면 국민 대다수가 존경하는 이국종 교수님을 언급해야 한다. 우리가 그 분을 존경하는 것은 어떤 험악한 외상을 입고 온 환자라도 하던 생각 멈추고 칼을 드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목숨 걸고 칼을 드는 사람. 그래서 우리가 존경한다. 그런데 우리 중 몇 %나 자녀들에게 ‘너희도 저런 훌륭한 분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해 주고 있을까? 참 존경은 하는데, 하시는 일이 참 소중한 일인데, 우리 자녀들이 그걸 감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그것이 우리 마음이 아닐까 되돌이켜 본다.

어머니 뱃속에 물주머니가 있었다. 간 위쪽 공간에 자리잡은 지름이 12cm 정도 되는 커다란 핏주머니였는데, 어머니 60대에 동기인 안만수 선생이 발견해서 십 수년 간 잘 관리해 왔다.

어머니가 일흔 일곱 되시던 해에 담낭결석이 생기신 것 때문에 입원하셔서 여러 검사를 하다가 지름 15cm,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탱탱볼 크기 정도로 커진 혈종 제거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은 고대병원 간담췌외과장이 되신 김동식 교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어머니께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이 혈종을 지금 외과적 수술로 제거해야 하는데, 수술하다가 조금이라도 혈종을 잘못 건드려서 터지면 과다출혈로 손쓸 틈 없이 사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수술 없이 잘 관리하고 사실 수도 있는데, 간 위쪽 조직은 벌써 단단해 지기 시작했고, 추후에 암으로 진행된다면 거기에 맞는 대응을 하면서 치료하시고 연명하셔도 됩니다.”

어머니는 수술하지 않는 쪽을 택하셨다고 한다. 잠시 후 들린 내가 상황 설명을 듣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엄마, 엄마가 세브란스 암병동에서 20년 가까이 호스피스 자원봉사 하시면서 만났던 그 많은 환자분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수술이 이 수술 이예요.

암으로 진행되기 전에 수술하는 거. 우리 목숨 걸고 해요. 이 수술.” 아직도 눈물을 뚝뚝 흘리시던 어머니가 기억난다. “그래, 네 원이라면 내가 죽어도 이 수술 받다가 죽으마.”

고대병원은 병실 복도 끝 쪽이 의과대 교실로 연결되어 있어서 주치의 교수님이 병실에서 의대 교수실로 돌아가시며 ‘참 부담이 큰 수술일 수 있는데, 어찌 보면 잘 되었다.’고 생각하시던 차에 연락이 갔다 한다.

환자분이 수술하기로 마음을 바꾸셨다고. 수술이 끝날 때쯤 교수님은 나를 불러 작은 축구공만 한 혈종을 보여주셨다. 어머니도, 교수님도, 가족들도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맛볼 수 없는 기쁨을 누렸다.

어머니가 이겨낸 두려움을 집도하신 교수님이 감당하셨고, 그렇게 이겨낸 두려움은, 더 어려운 환자를 위해 수술을 해야 하는 두려움도 감당하게 한다. 삶은 그렇게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으로 진보한다.

그리고 표창장이나 증명서의 진위를 가리는 일은 검사님 한 분 정도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수십 명의 검사님들이 백여명 이상의 수사진을 지휘해서 일사불란하게 사소한 모든 것까지 당신과 가족을 검증한다면, 또 그것이 다른 정치세력과 언론에 실시간으로 노출이 된다면 감당할 사람이 있을까? 없다.

그 두려움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수사 주체인 검사님들도 안다. 이토록 무섭게 몰아치는 이유는 다시는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감히 저항하지 못하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을 원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개혁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짓밟혀 ‘다시는 개혁을 할 생각도 의지도 스스로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두려움을 함께 감당하고 이겨내야 산다.


저작권자 © 일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