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6월 7일 당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신경영선포식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이를 전 임직원에 전파하도록 했다. 그 삼성의 주력 기업 삼성전자가 그야말로 마누라와 자식까지 바꿀테세다.

보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연간 생산하는 스마트폰 3억대 가운데 20%인 6000만대를 세계 각국에 있는 자사 공장에서 만들지 않고 중국 업체에 위탁 생산키로 했다고 한다.

애플과 나이키처럼 원하는 디자인을 선택해서 생산자가 알아서 생산하게 하고 제품명과 브랜드를 유지하는 소위 제조사 생산 방식(ODM)도 병행하는 조치로 보인다. 주문자인 삼성전자가 중국 제조업체에 제품의 생산을 위탁하면 중국 제조업체는 이 제품을 개발·생산해 삼성에 납품하고, 삼성은 이 제품을 유통·판매하는 형태다. 따라서 삼성은 생산과 설계 등에서 빠지고 제조회사가 완제품을 만들어 내면 이를 삼성 브랜드로 파는 방식이다.

주문자가 만들어준 설계도에 따라 생산하는 단순 하청생산 방식인 '주문자 상표부착 생산(OEM;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과 달리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제조업체가 주도적으로 제품을 생산( Original Design Manufacturing)이다.

세계 휴대폰 제조업체 명문가인 삼성이라는 브랜드는 유지한 체 이미 축적된 중국 휴대폰 제조업체에서 생산된 제품에 그 브랜드를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성과 제조업체 모두에게 손해날 게 없는 구조이다. 이처럼 ODM 방식이 확산하는 데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다.

화웨이나 샤오미 등 값싸고 품질 좋은 100달러 안팎의 중국 시장에서 삼성 브랜드를 유지하려면 극약 처방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아닌 ‘메이드 인 차이나’에다 '삼성'이란 브랜드만 붙여 판매하는 셈이다. 아이폰의 애플은 대만 폭스콘에 부품과 설계도를 주고 조립을 의뢰하는 데 반해 삼성은 아예 통째로 제조업체에 맡기는 방식으로 보도됐다.

문제는 제품을 제조할 때에 필요한 부품이나 설계도를 전혀 관여하지 않을 경우 그동안 삼성에 부품공급과 설계에 참여했던 국내 기업들이 설 땅이 좁아진다는 점이다.

이 같은 방식이 삼성을 포함한 국내 다른 대기업으로 확산할 경우 국내 협력업체들이 이젠 중국을 포함한 해당국 제조업체에 매달려야 하는 지경까지 갈지도 모른다. 삼성이 고품질 저가의 중국산과 맞서기 위해 가격을 정해 제품을 주문하면 이들 중국기업 처지에서는 주문자가 원하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협력업체에 제품 원가를 기존 보다 낮춰 공급요건을 제시하는 게 불 보듯 뻔한 상황이라 갈수록 협력업체들의 타격이 도미노처럼 이어질 수 있다.

그 좋은 사례가 바로 대만 반도체 수탁생산업체인 TSMC이다. TSMC는 지난 3분기 창사 이래 최고 실적을 달성하며 '반도체 코리아 연합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저조한 실적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는 3분기 영업이익이 1079억대만달러(34억6000만달러·약 4조1000억원)으로, 지난해까지 최고 실적을 보였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올 3분기 초라한 실적을 뛰어넘었다는 보도다. 위탁생산 업체가 오히려 원 제조업체를 위협하는 형국이다.

TSMC는 팹리스로 불리는 설계 전문업체가 상품을 주문하면서 넘겨준 설계도면대로 웨이퍼를 가공해 반도체 칩을 전문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종류가 다양하고 생산원가가 비싼 반도체 특성상 설계와 생산을 동시에 생산하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보다 주문자들이 많고 다양하므로 당연히 매출과 영업이익이 좋았다는 분석이다. 대만계 미국인인 모리스 창이 여러 회사에서 위탁받은 반도체를 대량 생산해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본 끝에 지난 1987년 최초의 파운드리 회사인 TSMC를 설립, 세계 반도체 회사들의 주문을 대행하고 있다.

삼성전자마저 초저가 원가 경쟁에 나서기 위해 ODM 방식을 선택 한 마당에 현대자동차를 포함한 국내 기업들도 이 같은 방식에 나설 때 국내 소재와 부품산업도 이젠 글로벌 브랜드 업체가 요구하는 수준의 품질과 원가 경쟁에 불가피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화장품 원료 공급업체인 콜마에서 각기 다른 화장품회사들이 주문한 원료를 공급하듯이 이젠 반도체 분야와 휴대폰 시장까지 이같은 현상이 확산한 만큼 삼성발 제조사 생산 방식(ODM)에도 국내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에 오랜 제조 노하우를 확보한 국내 협력사들도 기존 설비를 활용해 해외에 넘겨준 ODM을 국내에도 유치할 수 있는 협의체에 관계 당국도 적극으로 지원책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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