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1551년 명종 6년에 문정왕후가 불교중흥정책을 펴면서 강남 봉은사를 선종의 우두머리 사찰(禪宗首寺刹)로, 이곳 봉선사를 교종의 중심 사찰(敎宗首寺刹)로 삼고 전국 사찰을 관장하게 했다. 1552년에는 봉선사에서도 승과고시인 교종시(敎宗試)를 열어 승려교육 진흥을 위한 교종의 중추 기관이 됐다. 1562년 명종 17년에는 교종 본산으로 사세를 떨쳤지만, 문정왕후가 죽자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봉선사의 주 임무가 세조와 비 정희왕후의 능인 광릉을 보호하고 선대 왕의 극락왕생을 위한 철저한 왕실 기도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후대 왕들도 선대 왕릉을 기리기 위한 사찰인 만큼 절의 격을 높이고 유지하는데 각별한 정성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세종 때에 이전의 불교 7종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할 때 운악사 역시 통합했다가 1469년 예종 1년에 선대왕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가 세조를 추모해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奉先寺)로 개칭하면서 다시 국가급 사찰로 격상시킨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봉선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됐다가 1790년 정종 14년에 전국 사찰을 담당하기 위한 5규정소(五糾正所)를 설치할 때 함경도 일원의 사찰을 관장했고, 1902년에는 16개의 중법산(中法山)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어 경기도의 전 사찰을 관장했다. 1911년에 사찰령이 반포되었을 때는 31 본산의 하나이자 교종 대본산으로 지정돼 교학진흥의 주역을 담당했다.
현대에 이르러 1970년에는 운허(耘虛) 주지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면서 대웅전 이름을 통상적인 한자로 하지 않고 한글인 ‘큰법당’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글 현판을 달았다. 또 법당 사방 벽에는 한글 ‘법화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놓아 이채롭다.
큰 법당 앞에는 1975년에 운허 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한 5층 탑이 있고 운허 스님의 속가 사촌 동생인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사찰안에 있다.
운허(雲虛, 1901~1980) 스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상해에서 흥사단에 가입, 독립운동을 펼치다 30세에 출가한 이후 동국대 역경원장을 역임하면서 대장경의 한글 번역을 봉선사에서 시도하면서 불교 대중교화에 주력했다. 그 뒤를 이어 현재 월운 스님이 역경 사업과 한글 서당을 운영하면서 젊은 인재를 배출, 교학 불교에 큰 디딤돌 역할을 했다.
특히 이곳에는 역대 스님들의 유골을 모시던 사리탑 또는 부도탑 등과 함께 춘원 이광수의 추모비도 있다. 춘원 이광수는 금강산 답사길에 만난 월하 노스님의 ‘법화경’ 소개와 사촌 형인 운허 스님의 불교에 대한 영향을 받아 ‘원효대사’, ‘꿈’ 등과 같은 불교 소설뿐만 아니라 사촌 형의 대장경 역경을 도운 것으로도 알려졌다.
최종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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